세쇄지담 34

타인의 상처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매미 허물은 아주 심할 정도의 낙서나 무의미하고 무성의한 줄긋기 따위가 아니라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든 아니면 헌책방에서 구한 책이든 나는 책에 남아 있는 타인의 흔적을 썩 나쁘지 않게 생각한다. 나와 같은 책을 펼친 과거의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른 곳을 조금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다. 사실 그래서 이전에는 책 첫장에 대출카드가 아직 남아 있는 책을 우연히 빌리게 되었을 때에는 괜히 내 이름을 적어 넣고는 했다. 바쇼의 하이쿠 선집을 구해서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책에는 한 귀퉁이가 접혀 있는 페이지가 이곳 저곳 있었는데 나는 그 가운데서도 이 하이쿠에 눈길이 갔다. 어쩌면 단순히 중간 중간 독서를 중단한 위치를 표시한 것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여름 내가..

세쇄지담 2024.02.29

글쓰기와 경험

한 편의 글을 끝냄과 동시에 모든 것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글쓰기의 경험과 함께 내 삶의 특정한 시기로 묶기에 충분한 어느 경험의 연속체 속에 間斷이 도입되었다. 종료된 시기, 다시 말해서, 이곳에 오기로 결정했을 무렵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간만큼 나 자신의 경험에 관해서 여러 가지 방식을 실험해보며 글로 남긴 시기는 여태까지의 생애 전체를 놓고 보아도 드물 것이다. 그 이전에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에 대한 글쓰기를 회피해왔으며 여전히 글쓰기는 꽤나 겸연쩍은 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계속 무엇인가를 썼던 까닭은 그것 외에는 모든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모든 것이. 글은 읽히지 않았고 사람들의 말도 그것이 모국어이든 외국어이든 나는 들을 수 없었으며 응당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나 외의 다..

세쇄지담 2023.09.08

黑猫

어떤 슬픔은 그것이 슬픔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아주 잔잔하게 흘러들어와 느린 속도로 마음에 와닿는다. 들려온 일이 사실이 아닐 수 있으며 여전히 다른 가능성이 열려 있을 수도 있다는 약간의 희망 섞인 기대가 슬픔의 느낌을 지연시키지만 느낌은 언젠가는 확실히 도착하여 괜히 더 오랫동안 품게 되고 그렇기에 깊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느리게 도착한 만큼 긴 시간 동안 천천히 애도할 수밖에 없는 상실의 자국을 남긴다. 어느 날부터 별장에 종종 찾아오던 검은 고양이 쫄보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느닷없이 찾아온 일은 아니다. 쫄보와의 만남이 길었던 만큼 쫄보의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없더라도 그 아이가 야생 고양이치고 이미 상당히 오래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출국하기 전부터 어쩌면 이번에 보는 것이 ..

세쇄지담 2023.08.23

失地

한때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필요해서 영화를 보았는데 적어도 최근에는 다른 장소를 보고 싶어서 영화를 보았다. 작은 화면 속에서 후쿠오카의 전경이나 안개 낀 시애틀 그리고 범람하는 메콩강을 보는 것이 좋았다. 가보고 싶은 곳들이 늘어난다. 한때는 지금 내가 있는 여기가 그토록 있고 싶어 했던 곳이라는 사실이 낯설다. 하지만 지금은 보들레르의 「이 세상 밖이라면 어느 곳이라도」처럼 이곳이 아니기만 하다면 어디라도 좋은 것이다. 어느 작가에게 베를린이 그가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은 도시인 것처럼 내게는 파리가 그런 도시이다. 파리는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파리에 있는 동안은 잃기만 했다. 더 잃어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다 잃을 때까지 상실을 반복한 시간들. 그러니 영화를 본다. 영화를 보는..

세쇄지담 2023.07.24

욥의 노래

구약의 욥기는 상당히 난해하고 이해하기 껄끄러운 내용의 책이었다. 사탄과의 내기를 위해 욥에게 고난의 시험을 내리고 끝내 그 보상조차 불완전하게 해준 신은 그 어떤 논리로도 변호하기가 어려워보였다. 욥이 친구들과의 대화 내내 강변하는 것처럼 그에게는 어떠한 잘못도 없었기 때문에 그가 당하는 수난에는 납득이 갈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당하지 않아도 될 고통을 내리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구태여 내린 신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욥을 두고 신에게 내기를 제안했던 사탄은 이야기의 서두를 제외하면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욥이 신앙을 지켜내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사탄에 대한 반박이 이뤄졌다는 교훈이 이 이야기를 통해 성립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욥이 겪은 슬픔과 잃어버린 자식들은 재산에 대한 보상으로..

세쇄지담 2023.05.10

자기애에 관하여 ; 혼합된 단상

자기애는 모든 것을 굽어지게 만든다. 스스로에 대한 애정은 나는 나이기 때문에 옳고 타인은 타인이기 때문에 곧 타인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르다는 결론을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서 고집하게 만든다. 그렇게 자신으로부터 타인에게 향하는 화살은 언제나 적중해야 하지만 타인으로부터 자신에게로 향하는 화살은 언제나 비껴나가게 되어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너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나를 판단하는 것조차 너의 기준이 아니라 나의 기준으로 처리해야 한다. 너의 판단은 틀릴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데 너의 기준은 나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의 편의에 맞춰져 있어 나에게 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긍정을 지워내고서는 즉 일단은 자기 자신으로서 존립하지 않은 채로는 타인과의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언제..

세쇄지담 2023.04.10

Bygone

Rodrigo: Concierto de Aranjuez: II. Adagio Joaquín Rodrigo · Song · 2020 open.spotify.com 근래에는 지나간 일들을 자주 생각하게 된다. 딱히 회한에 잠기는 것은 아니지만 고개의 방향이 미래보다는 과거 쪽으로 돌아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돌이킬 수 없이 종결되어 버린 시간들을 나도 모르는 새에 꽤 오래 떠올리고 생경함을 느낀다. 이럴 때면 기형도의 시, ⟨대학 시절⟩을 곱씹게 되는데 막 대학에 들어가 그 시를 처음 읽던 시절의 나는 그런 시절의 나를 언젠가 회고하게 될 미래의 나를 얼핏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처럼 당시에는 나의 시간축은 미래를 향해 기울어져 있는 것이 당연했다. 대학을 졸업하는 것도 유학을 오는 것도 그 모든 일들을 ..

세쇄지담 2023.04.02

눈물자국 같은 나날들

요즘의 날씨를 객관적으로 표현한다면 아마 칙칙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는 줄도 몰랐던 비가 그친 뒤에 아직 하늘은 납빛에 조금 더 가깝고 바람은 서늘하고 습도가 꽤 높은 아침의 날씨를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왜인지 모르게 좋아했다. 마치 한바탕 울고난 뒤에 눈물을 닦아내고도 아직 채 다 마르지 않아 축축한 자국 같은 날씨이다. 그래서 울지도 않았는데 마치 지칠 정도로 울어버린 것만 같고 또 아직 남아 있는 눈물자국 위로 덜컥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날씨이다. 이런 날에는 지각의 범위가 확장되어 평소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일들도 감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늘어나는 인식의 크기만큼 세계가 마치 확장된 것처럼 느껴졌고 그 속에 담겨있는 사물들의 크기와 밀도 그리고 강도 역시 남다르게 느껴..

세쇄지담 2023.03.10

先後

물을 주지 않은지가 꽤 오래되었는데도 몬스테라의 화분의 흙을 만져보니 아직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반면에 물을 꼬박꼬박 주고 있는 테이블 야자는 벌써 수분기가 모두 말라버렸다. 어쩌면 몬스테라는 과습으로 인해 죽은 것이 아니라 창가에서 떨어진 그 날에 낙하의 충격으로 죽어버려서 더 이상 물을 흡수하지 못하게 된 게 아닐까? 물론 단순하게 생각해서 과습으로 죽고 아직까지 그 흙이 마르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세쇄지담 2023.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