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쇄지담

욥의 노래

RenaCartesius 2023. 5. 10. 23:07

구약의 욥기는 상당히 난해하고 이해하기 껄끄러운 내용의 책이었다. 사탄과의 내기를 위해 욥에게 고난의 시험을 내리고 끝내 그 보상조차 불완전하게 해준 신은 그 어떤 논리로도 변호하기가 어려워보였다. 욥이 친구들과의 대화 내내 강변하는 것처럼 그에게는 어떠한 잘못도 없었기 때문에 그가 당하는 수난에는 납득이 갈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당하지 않아도 될 고통을 내리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구태여 내린 신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욥을 두고 신에게 내기를 제안했던 사탄은 이야기의 서두를 제외하면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욥이 신앙을 지켜내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사탄에 대한 반박이 이뤄졌다는 교훈이 이 이야기를 통해 성립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욥이 겪은 슬픔과 잃어버린 자식들은 재산에 대한 보상으로 상환될 수 없으므로 신의 시험은 인간에게는 이미 필패가 확정되어 있는 불공정한 내기로 보인다. 어쩌면 욥기는 그 무엇이든 합당한 이유 없이도 행할 수 있는 신에게 굴종하는 편이 차라리 조금이라도 덜 잃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주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욥기는 오랫동안 고통을 감내하는 것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는 기독교적 노예도덕의 표본처럼 여겨졌다. 이런 해석은 아마도 구약의 도덕관이 오늘날의 상식과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경향에 영향을 받은 결과일 것이다. 내가 그동안 접했던 욥기에 대한 해석논쟁은 대부분 당대에 자식은 언제든 다시 낳을 수 있었기 때문에 신의 보상이 불완전하게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식의 변신론을 펼치거나 그러한 변신론의 괴상쩍음을 지적하는 식으로 ‘보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 스피노자의 성서비평에 관해 정리하면서 욥기를 다시 읽어보니 이 책의 주제는 ‘신앙을 지키면 보상을 받는다’가 아니라 ‘인과응보라는 인간적 가치관으로 신법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되었다’에 더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째서 도덕적인 사람이 고통을 받는가?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뉘우치기를 권고하는 것처럼 사실은 어떤 내밀한 죄가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욥이 정당하게 반박하는 것처럼 욥이 아는 한 욥은 죄를 짓지 않았다. 만약 그가 비록 모르고 있으나 벌을 받기에 마땅한 죄가 있다면 최소한 그 죄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게 합당하지 않을까. 더욱 결정적으로 누가 보아도 부도덕하고 부정직한 사람들이 현세에서 득세하는 것이 현실이다. 도덕적인 사람이 정당한 몫을 차지하거나 물질적 행복을 누리지는 못하더라도 부당한 박해를 받는 것 역시 현실이다. 현실은 부조리하다. 이렇게 본다면 신법만큼 공정과 거리가 먼 것도 없다. 
 
그럼에도 욥은 자신이 아무 이유 없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신앙을 버리지도 않고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가 있을 것이라 믿고 거짓으로 뉘우치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절규할 뿐이다. 욥의 친구들은 그러한 욥의 태도가 오만하다고 꾸짖는다. 이처럼 우리의 행불행에 어떤 내밀한 이유가 있다고 지어냄으로써 그로부터 위안을 받으려는 심리조작방식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상당히 익숙한 수법이다. 하지만 욥기에서 신은 욥의 친구들이 자신에 대해 욥만큼 ‘올바르게’―공동번역 성서에서는 매우 밋밋하게 그리고 부적절하게 '솔직하게'라고 번역되었다― 말하지 않았다고 화를 낸다. 즉, 신법의 행정은 인과응보의 논리에서 벗어나 있다. 
 
신은 내가 행한 좋은 일에 대한 보상을 달라고 혹은 저 자는 나쁜 일을 했으니 벌을 내려달라고 그도 아니면 내가 이렇게 뉘우치고 있으니 용서해달라고 빌 수 있는 기복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굴종으로조차 신을 조종할 수 없다. 우리는 괘씸한 사람이 난처한 일을 당했을 때 천벌을 받았다고 고소해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왜 신은 왜 저 좋은 사람을 먼저 데려가는지 한탄하고 또는 제발 저 자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저주하기도 한다. 신의 이름으로. 하지만 신법은 인간적 기준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신이 인간사에 무관심해서도 아니고 신의 선악 개념이 인간과 달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신은 우리가 인간적 가치관을 꾸며내서 그에게 덧씌운 방식대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물질적 영화가 그의 선함의 증거도 아니고 누군가의 실패가 그의 악함의 증거가 아니다. 현세에서의 행불행이 그의 행실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신이 선한 일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 나쁜 일에 대한 벌을 내려주는 공정한 심판관이기 때문에, 그를 믿으면 우리의 안전이 보장되기 때문에 그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힘과 의지에 따라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 그 모든 결과에 무관하게 그에게 복종하는 것 자체가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복종한다. 아니,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데, 신법은 우리가 좋든 싫든 인간적 이해관계와 가치를 넘어서 작동하고 있는, 인간 이외의 다른 자연의 부분들까지 망라하는, 자연 전체의 보편적 법칙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복종하는 대상의 내용이 아니라 복종 자체가 신민을 신민으로 만들며 복종 그 자체가 신민의 공이다. 그에게 복종은 곧 “법적으로 선한 것과 공동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져야 마땅한 것을 실행하려는 지속적 의지”인데 이 의지는 다른 모든 외적 조건과 무관하게 오직 자신의 결정을 밀고 나가는 능동적 작용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민의 미덕이란 외적 조건과 무관하게 혹은 설령 외적 조건이 모든 복종의 물적 토대를 무너뜨리고 있더라도 그 의지를 철회하지 않은 채 복종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우리에게 합당한 삶의 규칙을 찾아 그에 따라 살도록 우리 자신과 타인들의 행동을 규제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모두 인간적 규칙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며 그렇기에 여전히 다른 요인들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판단 기준에서 부도덕한 것이 승리하며 우리의 법으로 그것을 처벌할 수 없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그럴 때면 우리는 으레 신법에 기대지만 애초에 신법은 그런 일을 처리해주는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다만 신법을 이해하고 인간의 법 역시 이해하고 준수해야 한다. 더  나은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복종을 전제로 해서 가능하다. 법의 무용성이나 불공정성을 주장하는 것은 실제 상황의 부당함과 무관하게 그 상황을 바꾸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사람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뿐이다. 보상과 처벌이란 사실 없으며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막연하게 닥친 일들을 우리가 그렇게 해석해버린 데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불공정성 역시 주장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물질적 영화가 우리의 힘에 온전히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설령 보상과 처벌이 없더라도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할 뿐이다. 
 
따라서 욥의 피해가 완전히 보상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법의 불공정함과 셈법의 오류를 고려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욥기의 핵심적 메시지는 결국 그러한 인간적인 상벌의 논리로 신법을 해석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인간적 변론을 덧붙인다면 신이 보상해주지 않아도 되는 일에 직접 나서서 욥을 챙겨주었다는 점이 교환의 논리를 넘어선 신의 자비를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성서는 대중의 이해력에 맞춰 작성되었다는 스피노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욥기의 마지막 구절에서 욥의 재산이 몇 배로 늘어났다는 서술은 미래의 보상에 대한 약속을 통해 사람들이 법에 복종하도록 유인하기 위한 수사적 효과를 더하기 위해 부언된 내용이다. 보상이 없는 일에도 성실한 이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욥기의 저자는 곤란한 문제는 모두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차원으로 지연시켜두는 기독교의 오랜 수법에 따라 신실함에 대한 보상이 아직 오지 않은 순간에 오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통해 대중들이 현재만큼에는 어떤 보상 없이도 복종하게끔 유도하였다. 이 점에서 욥기의 저자는 인간 심리의 매우 날카롭게 꿰뚫어 보고 있었던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왜 착한 사람이 고통받는가 ? 왜 준법이 보상받기보다는 편법이 더 큰 혜택을 누리는가 ?  그는 보상의 논리를 미래의 시점으로 지연시켜 이러한 곤란한 질문을 상쇄하고 '현재'에 주목하도록 만드는 논리를 구사한다. 이로써 텍스트 안에는 이중 구조가 생겨난다. 한편으로는 보상을 통해 사람들을 복종으로 유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종 자체의 미덕을 가르친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신음한다. 하지만 이를 달래기 위해 이래서 혹은 저래서 우리가 고통스럽다고 진단하며 이런 저런 의식으로 기복을 비는 미신에 빠지기 보다는 일단 자연의 필연성을 겸허히 받아들인 채 인간의 법을 준수하는 것이 더 낫다. 어쩌면 이것이 욥기의 도덕적 교훈일지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발생하는 간극으로 인해 자기 자신 안에서는 아주 조금이나마 늘 괴로울 것이라고 단정해버렸다. 그리고 그 괴로움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할 지라도 아무리 큰 외적 쾌락으로도 지울 수 없을 것이라고 믿어 버렸다. 하지만 사람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것도 그에 따라 보상과 처벌을 계산하는 것도 나의 몫이 아니다. 별로 합당한 이유 없이도 우리는 괴롭거나 행복할 수 있다. 성공에 자만하고 도취해서도 안 되고 실패를 조롱하고 비웃어도 안 된다. 그것이 초월자의 변덕 한 번에 뒤집어 지는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세에서의 성공과 실패가 그 어떤 견고한 토대를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정당한 노력의 대가인지와 무관하게 물질적 영화는 사람의 존엄성과 도덕성과는 전혀 무관한 가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이 욥의 생명만큼은 건드리지 말라고 한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그렇다. 어떻게 살아있든 오직 살아있는 것 자체만이 가치있으며 그 점에서 모두 동등하다. 나머지는 애초에 나의 것이 아니다. 이번 욥기의 독서로 위안을 얻었다면 나는 무엇을 했는데 이렇고 남은 무엇을 했는데도 저렇다는 식의 생각에 속박에서 한겹 풀려나 이따금 그런 생각이 다시 옥죄일 때도 더 쉽게 벗어던질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고독과 맞서려고 한다면 적당히 부정직해지거나 아니면 끊임없이 부정하고 부정되는 길을 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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