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쇄지담

失地

RenaCartesius 2023. 7. 24. 06:10

한때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필요해서 영화를 보았는데 적어도 최근에는 다른 장소를 보고 싶어서 영화를 보았다. 작은 화면 속에서 후쿠오카의 전경이나 안개 낀 시애틀 그리고 범람하는 메콩강을 보는 것이 좋았다. 가보고 싶은 곳들이 늘어난다. 

한때는 지금 내가 있는 여기가 그토록 있고 싶어 했던 곳이라는 사실이 낯설다. 하지만 지금은 보들레르의 「이 세상 밖이라면 어느 곳이라도」처럼 이곳이 아니기만 하다면 어디라도 좋은 것이다. 어느 작가에게 베를린이 그가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은 도시인 것처럼 내게는 파리가 그런 도시이다. 파리는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파리에 있는 동안은 잃기만 했다. 더 잃어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다 잃을 때까지 상실을 반복한 시간들. 

그러니 영화를 본다. 영화를 보는 시간 만큼은 내가 아직 가보지 않은 곳에서 그래서 내가 아직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그곳에서의 기회들을 나 대신 잃어버리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볼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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