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쇄지담 34

八福

마태福音 五章 三―一二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1940. 12) 구약과 신약은 문자 그대로 약속을 뜻한다. 구약은 야훼를 유일신으로 섬기겠다는 히브리인들의 약속이고 신약은 예수의 대속으로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신의 약속이다. 사랑을 알기에 보복을 맹세하게 된다. 보복을 맹세함으로써 사랑과 멀어지게 된다. 새로운 약속이 용서의 미덕을 가르친다면 오래된 가르침은 새로운 약속 이후에 무엇을 맹세하도록 요구하는 것일까. 마태복음을 읽을 때 사랑과 보복의 종교로부터 용서를 배우며 나는 모두를 모두 ..

세쇄지담 2023.03.07

어느 날 고릴라가 내게 바나나를 주었다

짧은 방학이다. 익숙한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홀로 단조로운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시간을 느끼는 감각에 이상이 생긴다. 이것저것 붙잡고 비교해볼 것이 없으니 시간의 유속은 무척이나 더딘 것 같기도 또 무척이나 가빠른 것 같기도 해서 언제는 문득 수십 년도 넘게 흐른 것 같다가도 돌아서면 또 찰나의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간이 무한정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오 속에서 시간감각이 이상해지면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살면서 거쳐온 특정한 시간적 구조의 패턴이 어떠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게 된다. 고작 한 학기를 이곳에서 대학 수업을 들으며 보냈을 뿐인데 이제는 한국에서 지냈던 시간이 꿈결처럼 느껴진다. 한때 익숙했던 특정한 공간과 결부되어 있던 시간적 연쇄의 ..

세쇄지담 2023.03.02

고트프리트, 너는 죽어가고 있는가?

Gottfried Wihelm Leibniz, 한국에는 '라이프니츠'로 알려진 철학자의 이름을 따서 '고트프리트'라고 이름을 지어준 나의 반려식물 몬스테라가 아무래도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 테라스에 놔두었다가 2층에서 떨어져 화분이 깨진 탓에 분갈이를 해주었는데 습도 관리를 제대로 해주지 못해서 과습으로 인해 뿌리가 썩은 것 같다. 마치 죽음의 신호처럼 자라난 흰곰팡이를 열심히 제거해주며 언젠가 다시 건강하게 자라날 거라고 믿었지만 이파리들이 하나씩 누렇게 변해가더니 결국은 가장 크고 탐스러운 잎들마저 지금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도 몇 차례 곰팡이가 피어난 적이 있었지만 금새 잘 극복해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이파리 몇 개 정도만 피해를 입고 잘 넘어설 수 있을 거라고..

세쇄지담 2023.02.17

近狀

어느덧 2월 중순이다. 이제 설 연휴도 지나갔으니 연초라는 말도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만큼 23년이 성큼 시작된 것이다. 한동안 가족들이 방문해서 머물다 갔고 다시 나의 리듬을 서서히 되찾아가고 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번 주는 꽤 여러 일을 해냈다. 일기도 필기 정리도 더 꼬박꼬박 부지런히 써내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올 상반기는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좋은 평가도 많이 받았고 여러 모로 진전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느낌과 자극을 받았다. 오래 근심하던 일도 매듭지었고 앞으로는 어렵고 바쁘거나 실망스러운 일은 있을지라도 불확실하고 불안할 일은 적어도 당분간은 없을 듯하다. 그러면서도 하나가 열리면 또 하나가 닫힌다는 말이 자주 떠오르는 시기였다. 내일은 어쩌면 중요한 결과가 발표될지도 ..

세쇄지담 2023.02.13

意味의 空洞化

어느 날은 문득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 굉장히 낯설다는 생각이 들고, 또 어느 날은 문득 땅 위에 나서 하늘로 솟아나는 나무가 어색하게 보이고, 또 어느 날은 문득 빗방울이 땅에 닿는 소리가 들리는 것에 무안함을 느끼고, 또 그렇게 문득, 습관처럼 덜컥 열었지만 어느 날엔가부터 잘 빠지지 않고 삐걱이는 서랍장처럼, 그렇게 덜컥 모든 것은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또 한 번 의미를 잃는다.

세쇄지담 2023.01.08

Omnipresence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다. ⟨신과 함께⟩ 같은 신파극에 멀티버스와 피씨함와 힙함을 1절만 하는 것도 아니고 2절에 3절 4절 그리고 카카시 뇌절에 뇌절까지 거듭하여 뒤섞고 비튼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전달하려는 '메시지'나 영화가 견지하고 있는 세계관 혹은 존재론적∙윤리적 입장은 꽤나 단순하고 단조롭고 또한 이미 익숙한 것―아시아계 이민 1세대로서 현지 사회와 우당탕탕 충돌하며 세무조사라는 현실적인 압박을 받고 있는 동시에 그 모든 삶의 위기의 근원에는 서구 담론의 자유분방함이 모든 객관성이 뒤흔든 탓에 초래된 규범적 혼란이 있으며 그것이 자신에게는 딸의 동성애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다가왔다는 사태인식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의 분열된 내면 속 그 각각의 갈래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동시다발적으..

세쇄지담 2022.12.23

감람나무

겨울이라 기르는 올리브 나무를 실내로 들여놓았더니 가을 내내 찬바람을 맞다가 따뜻한 환경으로 바뀌니 다시 봄이 되었다고 착각이라도 한 것인지 새로운 이파리와 함께 꽃을 피웠다. 올리브라는 식물은 이렇게 조건만 맞으면 한 해에도 여러 번 꽃을 피울 수 있는 건가? 물을 주는 찰나를 제외하고는 줄곧 실내에만 두었고 겨울 찬 공기가 싫어 환기할 때를 제외하고는 창문도 거의 열어두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열매는 맺지 못할 것이다. 지난 여름에 맺힌 열매도 딱 한 알을 제외하면 제대로 영글지 못했는데 그나마 어느 정도 그럴 듯한 형태를 갖춘 그 한 알은 적절한 시기를 보아 뒷마당에 심어주었다. 사실 그마저도 생식력을 갖추고 있는 올리브 열매인지는 심히 의심스럽고 또 잡초의 틈바구니 속에서 잘 싹을 틔울 수 있을지..

세쇄지담 2022.12.22

취향에 관하여

며칠 전 신문에서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노벨상 수상에 부치는 글을 읽었다. 그것을 읽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막 공개되었을 무렵 어쩌다 페이스북에서 읽었던 아무개의 게시물이 생각났는데 그때 느꼈던 미묘한 불쾌함은 여전히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 내용은 대강 노벨 위원회의 결정이 점점 알 수 없어지고 있고 그래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가들이 자기가 살아있을 때 노벨상을 받는 모습은 볼 수 없을 거 같다며 '인지도'가 훨씬 없을 것이 분명한 작가들을 열거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쓴다는 진부함이나 그러한 글이 인기를 끄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투의 대화가 댓글로 이어졌다. 아마 그들이 아니 에르노를 '읽을 수' 있는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에르노가 뛰어난 작가인지..

세쇄지담 2022.12.10

취향과 윤리라는 이름의 상징폭력

특정한 코드의 취향과 윤리관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특정 집단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또한 소위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집단과 차별화하는 데 전략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그러한 코드를 상징하는 지표들을 통해 자신의 우월성을 돋보이게 하는 행위. 이에 관해 이따금씩 생각한지 꽤 오래되었다. 생각이 완전하게 정돈되지는 않았지만 계속 머릿속에 두고 있는 것보다 약간이나마 풀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약간의 편린이나마 언어화해보았다.

세쇄지담 2022.12.06

초파리

여름이 지나고 뒤늦게 찾아온 불청객 초파리 떼가 말썽이다. 끈끈이 함정을 설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초파리들이 평소에 자주 앉아있던 벽면에 함정을 부착했음에도 초파리들은 마치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함정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라도 하듯이 피해다녔다. 오직 단 한 마리만이 어쩌다가 재수없게 함정에 걸렸을 뿐이다. 내가 휴식 중인 초파리 떼에 접근했을 때 나를 피해 달아나던 한 마리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서 엉거주춤하다가 걸음이 꼬여버려 한쪽으로 걸려 넘어지는 것처럼 나를 피하려다 경황이 없는 중에 함정에 운나쁘게 걸렸을 뿐이다. 그마저도 달라붙기 전에 상당히 우왕좌왕했으니 아마 초파리들은 내가 모르는 모종의 방식으로 끈끈이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사과식초를 이용한 함정을 직접 만들어보기도 ..

세쇄지담 2022.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