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쇄지담

타인의 상처

RenaCartesius 2024. 2. 29. 06:31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매미 허물은

 

 


 

 

아주 심할 정도의 낙서나 무의미하고 무성의한 줄긋기 따위가 아니라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든 아니면 헌책방에서 구한 책이든 나는 책에 남아 있는 타인의 흔적을 썩 나쁘지 않게 생각한다. 나와 같은 책을 펼친 과거의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른 곳을 조금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다. 사실 그래서 이전에는 책 첫장에 대출카드가 아직 남아 있는 책을 우연히 빌리게 되었을 때에는 괜히 내 이름을 적어 넣고는 했다. 

 


 

 

바쇼의 하이쿠 선집을 구해서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책에는 한 귀퉁이가 접혀 있는 페이지가 이곳 저곳 있었는데 나는 그 가운데서도 이 하이쿠에 눈길이 갔다. 어쩌면 단순히 중간 중간 독서를 중단한 위치를 표시한 것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여름 내가 한 편의 시이자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그 여름의 끝'을 읽고 있을 때 누군가는 이 하이쿠를 읽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어쩌면 나는 타인의 상처를 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나의 시선을 이 하이쿠에 혹은 누군가의 상처에 고정시켰다. 존재가 텅 비어 버릴 정도로 쏟아지는 슬픔은 드물며 그것이 전달되는 경우는 더더욱 흔치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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