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쇄지담 34

겨울의 밤

기형도의 ⟨램프와 빵 —겨울 版畵 6⟩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주십니다. 파리에 도착한 아침, 나는 이제 계절이 명명백백히 겨울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길고도 짧은 여행이 끝나고 잠시 미뤄두었던 일상의 리듬에 다시 나를 맞춰가는 중이다. 여행을 하며 새롭게 얻은 것들을 채워 넣을 틈을 벌리고자 이리저리 애쓰면서 말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란데스 도서관의 카페에서 한 차례 느꼈던 두려움을 마주해야 한다. 오후 10시가 넘은 시각에도 대낮처럼 환하던 여름은 가버린지 오래이고 저녁식사를 할 무렵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가을은 커녕 그 즈음에 이미 한밤의 어둠이 엄습해있는 겨울로 들어섰다. 슈투트가르트 공항은 휑뎅그렁했다. 그렇게 큰 규모의 공항은 아니었지만 그 적막함이 ..

세쇄지담 2022.11.05

꿈에

얼마 전 꿈이 생생하다. 나는 꿈속에서 누군가의 고민을 경청하고 있었다. 익숙한 상황이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존재라는 상투적인 진실을 나는 아주 예전에 몸소 배웠기 때문이다. 상대 역시 그 점을 이미 알고 있지만 자신의 진심 때문에 직시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나는 직감했다. 나 역시 그랬었고 진작 떠나야 마땅했던 사람들 곁에 머무르는 결정을 내린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상대의 말을 들으며 나 역시 그랬다는 것을 상대에게 들려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상대의 말이 끝난 그 순간 나는 잠시 눈을 떴다. 찰나에 가까운 순간 나는 현실로 잠시 돌아갔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꿈의 흐름에 간단이 도입되고 나는 꿈결과 현실의 경계면이 무척이나 가깝게 맞닿아 있는 상태에서 나의 경험을 상대에게..

세쇄지담 2022.09.28

⟨스파이의 아내⟩를 다시 보고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스파이의 아내⟩는 내가 아오이 유우를 눈여겨 보게 된 영화로 기억하고 있다. 그 외에 달리 특별한 점은 별로 없었다. 이 영화의 구성에 관해 그야말로 '엄청나게' 찬양하는 평가도 보았지만 수긍이 가지는 않았다. 내 눈에는 영화의 플롯이 그다지 복잡하지도 정교하지도 않게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뿐인데 남이 좋아하는 것은 무시하는 사람들이 이 영화에만 유독 보여주는 호들갑이 내가 이 영화를 더 박하게 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나를 관심을 끄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위장 신분이긴 했지만) 여관에 기거하는 소설가라든가 차갑게 마시는 위스키라든가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든가. 영화는 상류층에 속하는 자유주의자, 혹은 인물..

세쇄지담 2022.09.12

인생은 솔리테어 같은 것

솔리테어, 정식명칭은 클론다이크. 윈도우 기본게임으로 설치되어 있는 이 카드놀이에 대한 최초의 인상을 가졌던 순간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마도 엄마가 플레이하는 장면인 것 같다. 게임을 클리어하면 현란하게 뒤섞이는 카드패가 어렸던 나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나는 이 게임을 하는 방법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게임을 실행해놓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가 이내 종료하고는 했다. 그러던 내가 조작법을 익히게 된 건 ―어떻게 배웠는지는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역시 모르겠다― 아마도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이 끝난 무렵이었던 것 같다. 아무것도 부과되는 것이 없어 무척 심심하고 무료한 때였다. 반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막 보급되기 시작했던 스마트폰으로 각자 게임을 하는 걸로 우리는 시간을 떼웠다. 우리는 룰 더 스카이 따위..

세쇄지담 2022.09.04

Rotten Apples

새로 들인 식물들은 잘 자라고 있다. 몬스테라의 잎이 약간 상한 상태로 배송이 와서 걱정했었는데 잘 돌봐주니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이번에는 비료도 사고 배양토도 따로 구매해서 사용했다. 한데 몬스테라에는 독성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아이 곁에는 두지 말라고 한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강아지들이 몬스테라 잎을 뜯어먹었다며 걱정하는 글이 잔뜩 나왔다. 올리브 나무를 분갈이 해줄 때 사용한 흙에서 자라난 이름모를 잡초는 클로버였던 것 같다. 뒷마당 가는 길에는 사과나무가 한 그루 심겨져 있다. 봄이 되면 나무는 꽃을 맺고 여름이 되면 열매를 떨군다. 사과 몇 알이 마당에 이리저리 나뒹군다. 그러다 쪼그라들기 시작하고 이내 부패한다. 오며가며 썩은 사과들을 본다. 수분이 죄 빠져나가 볼품없어진 흑변한 사과들..

세쇄지담 2022.08.29

음과 양

홍상수 영화 속 인물들은 그들이 아무리 많이 입을 열더라도 실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주저하고 어물거리고 말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에게 여러 문장을 발음하지만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으며 상대에게 시선을 던져 쳐다보기는 하지만 상대를 바라보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진심은 말의 바깥으로 미끄러지고 새어나간다. 말해지지 않는 그들의 진심은 그들이 말을 하는 틈 사이에 말 아닌 것으로만 전달된다.그들의 말에는 넋이 없다. 김빠진 맥주처럼 맥빠진 말만을 되풀이하는 리빙데드 또는 정신 없는 자동기계 장치, 그것이 홍상수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물들의 정체이다. 만약 홍상수의 영화에서 누군가 진심을 언어로 표현하기로 결심한다면 홍상수는 그 인물이 그 말을..

세쇄지담 2022.08.19

탈레스 혹은 올리브와 물에 관한 단상

작은 화분에 올리브 나무 한 그루를 키운다. 이 올리브는 내가 잠시 한국에 방문했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소르본 근처의 한 카페에 앉아 책을 읽다가 식물을 길러보기로 결심했고 마침 눈에 들어온 카페 맞은편의 한 꽃가게에서 데려왔다. 원래는 산세베리아나 몬스테라 같은 관엽식물을 사려고 했는데 제일 먼저 내 이목을 끈 것이 올리브였기 때문에 올리브를 골랐다. 그렇게 올리브를 반려식물로 들이고 나서야 나는 올리브가 어떻게 생긴 나무인지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되었고 그때부터 무엇이 올리브 나무인지 식별할 수 있는 감식안을 갖출 수 있었다. 식물에 관한 지식이 하나 보태지자 생각보다 훨씬 많은 곳에서 올리브 나무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올리브 나무는 재배환경에 따라..

세쇄지담 2022.08.09

루소의 『고백록』을 읽고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읽지는 않았으므로 크게 남는 것도 없는 독서였으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단어들이 남긴 희멀건 생각들의 최대한 쥐어짜내어 그 요점을 몇 글자 적기 위해 시도해본다면 우리는 투명하게 이해받고자 노력할 때 어떤 이는 바로 그 시점까지의 전 역사를 털어놓아야 할 필요성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나 역시 어느 정도는 공감어린 이해를 하는 모종의 강박을 가졌고 그 강박이 부과하는 속박 속에서 우리는 불필요할 정도로 비장해진 나머지 고백은 우리가 투명하게 고백한다고 결의하여 그것을 실제로 감행한다는 그 사실 자체로 말미암아 고백의 대상인 바로 그 시점까지의 역사는 뒤틀려버리는데 예를 들자면 쓰라리기만 했던 과거가 기억 속에 올라오는 과정에서 아름다워지고 그 아름다움이 덧씌어짐을 과거의 기록에 추가해야 ..

세쇄지담 2022.07.30

⟨첨밀밀⟩을 보고서

도망치는 사람이 싫다. 스스로 기만하는 사람이 싫다. 그곳이 어디든 늦게 도착하는 사람이 싫다. 어떤 규범도 따르고 싶지 않은 게으름뱅이라 다른 사람이 규범―설령 그것이 인습의 틀에 얽매인 것일지라도―을 지키는 것을 조롱하면서도 자신의 회피에는 기필코 당위를 부여하려는 사람은 더욱 싫다. 하지만 방황하는 사람은 미워하기 어렵다. 그가 자신이 내린 선택의 결과를 변명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특정 인물유형에 대한 반감은 영화와 무관한 나의 호오이다. 영화의 인물들이 그런 종류의 사람들과 혼동될 우려는 아마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이 방황했고 그렇지만 방황을 정당화하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나의 (자기) 혐오대상과 영화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이 잠시 합쳐졌다. 하지만 때로는 내가 선택..

세쇄지담 2022.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