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쇄지담

눈물자국 같은 나날들

RenaCartesius 2023. 3. 10. 23:28

요즘의 날씨를 객관적으로 표현한다면 아마 칙칙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는 줄도 몰랐던 비가 그친 뒤에 아직 하늘은 납빛에 조금 더 가깝고 바람은 서늘하고 습도가 꽤 높은 아침의 날씨를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왜인지 모르게 좋아했다. 마치 한바탕 울고난 뒤에 눈물을 닦아내고도 아직 채 다 마르지 않아 축축한 자국 같은 날씨이다. 그래서 울지도 않았는데 마치 지칠 정도로 울어버린 것만 같고 또 아직 남아 있는 눈물자국 위로 덜컥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날씨이다. 이런 날에는 지각의 범위가 확장되어 평소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일들도 감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늘어나는 인식의 크기만큼 세계가 마치 확장된 것처럼 느껴졌고 그 속에 담겨있는 사물들의 크기와 밀도 그리고 강도 역시 남다르게 느껴졌다. 나 스스로의 힘도 확장되어 오묘하게 들뜬 기분이 들고 그래서 아무에게나 또 무엇에게나 말을 걸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런 날들은 기억에 유난히 더 깊이 새겨진다. 살아가면서 그런 날들을 한겹씩 더 위로 쌓아올릴 때마다 점차 슬픔이 앏게 저며드는 것 같다. 어느새 무겁게 축적된 삶의 무게가 하늘에서부터 나를 살포시 누르고 있는 탓일까. 세상은 고통의 바다라는 어느 높은 가르침처럼 나의 기쁨은 어느덧 슬픔 속에 잠겨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날은 기쁨이 더 커서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는 것보다 앞으로 나아가고만 싶다. 그렇게 조금씩 지나온 날들을 언젠가 다시 찾아올 눈물자국 같은 날에 회상하게 될 터이다. 그때의 내게 기쁨과 슬픔의 비율을 어떠할지. 

 

빨래를 세탁기에 돌렸다. 설거지를 하다가 과도에 엄지를 앏게 베였다. 청소를 하고 또 혹시 몰라 썩어버린 몬스테라를 뒷마당에 옮겨 심어주었다. 무엇을 해도 오늘은 그것만으로 충분한 날이다.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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