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잡기 80

20231126_計

분주한 탓에 하루 늦게 한 주의 결산을 올린다. 존 로크의 『인간지성론』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고, 여러 가지 잡무를 해치우고, 츄러스를 튀기는 데에는 실패했고 또 사람들과 노래방에 갔으며 각자 공부한 내용을 공유하는 모임을 발족했다. 운동은 하지 못 했다. 그러고 보니 의도치 않게 술을 꽤 많이 마신 것 같다. 식이를 잘 절제하는 생활을 유지하다가 최근 간식과 야식을 챙겨서 먹었더니 살이 다시 조금 오른 것을 느낀다.

신변잡기 2023.11.28

20231119_計

They are ill discoverers that think there is no land when they can see nothing but sea ― Francis Bacon 『학문의 진보』에 나오는 말. 교수님은 'see'와 'sea'의 대구를 강조하셨다. 베이컨의 의도는 학문 탐구에서 열린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겠지만 곧잘 나의 연구 혹은 나의 삶을 망망대해를 떠도는 이미지로 표상하는 나에게 이 말은 약간의 위로를 주기도 한다. 손에 잡히는 무엇인가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편향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서는 안 된다. 오늘 반나절은 침대와 선반 조립을 하는 데 바쳤다. 이케아 조립은 그 자체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유익한 노동처럼 느껴지는데 확실히 몇 번 반..

신변잡기 2023.11.20

20231112_計

제법 쌀쌀하다. 겨울을 이기는 준비를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감자를 삶아 먹고 또 포토푀를 한솥 끓여냈다. 원래는 오늘 아쌈티 마들렌까지 구워내는 걸로 한 주를 마치려고 했지만 게으름이 도져서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래도 아마존에서 주문한 주방 저울과 온도계가 도착했으니 조금 더 정확한 마들렌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블로그에 기록을 남기기 위해 한 주를 톺아보다 내가 여행 전에 예매했던 힐러리 한의 공연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원래 오늘 신학정치론 세미나가 끝나고 다녀왔어야 했는데 까맣게 잊고 집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으니 스스로에게 황당함을 느낀다. 노션에 기껏 일정을 적어놓고 확인하지 않는 내 탓이다만 파리 필하모닉은 왜 리마인드 메일을 보내주지 않는 것인지.. 여행을 다녀와..

신변잡기 2023.11.13

20231105_計

여독을 음주로 풀면서 이번 주와 이번 주의 여행을 갈무리하는 글을 쓴다. 평소에는 계획이 틀어지거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상에 개입하는 것을 정말 끔찍하게 싫어하지만 여행 도중에는 우연의 질서 속에 나를 맡기려고 하는 편이다. 정해지지 않은 흐름을 따라 가는 것이 여행지에 얕게나마 녹아들어갈 수 있는 방법인 것 같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어느 한 도시에서 정말 특별한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그 여행으로부터 거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 했다. 그래서 나는 무척 오랜 기간 동안 여행은 단순히 장소의 이동 즈음에 불과하다고 여겼고 그래서 나는 여행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었다. 사실 딱 한 도시에서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 일은 그다지 많지 않은 법이라 나에게는 사람들이 여행에..

신변잡기 2023.11.06

20231029_計

갑자기 피부 트러블이 생겨서 원인이 무엇일지 고민해 보았다. 딱히 무언가 크게 바뀐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크 푸드를 많이 먹은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 일단 내복용 구내염 약을 먹고 설명서를 조금 읽어봤는데 이 약이라는 게 특별한 게 아니라 그냥 부족한 비타민을 공급해주는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과일을 먹지 않았다. 특별한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하던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오렌지와 사과를 사서 먹고 있다. 이번 주에는 꽤 오랜만에 책을 몇 권 구매했는데, 지베르 조셉에서 로크의 『인간지성론』과 장-프랑수와 케르베강의 『헤겔과 헤겔주의』, 그리고 그가 편집한 『칸트에게서 실천 이성과 규범성』 세 권의 사서, 조금씩 읽고..

신변잡기 2023.10.30

20231022_計

이번 주에는 예상치 못한 반가운 메일을 받았다. 아주 오래 전, 스피노자에게서 형상 인과에 관한 논문을 쓰려고 마음을 먹을 때 즈음 이 주제에 관해 논문을 쓴 학자에게 혹시 퍼블리쉬 전에 논문 초안을 받아볼 수 있냐고 메일을 보냈고 아주 감사히도 미리 해당 논문을 읽어볼 수 있었다. 그 후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그 논문은 퍼블리쉬가 계속 미뤄지고 있는 듯 했는데 이번 주에 그 사람이 메일을 보내 퍼블리쉬된 논문을 보내주었다. 그 동안 나는 주제도 바꾸고 지도교수도 바뀌고 여러 변화가 있었지만 연락을 없었어도 나를 기억하고 작게나마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감동이었다. 비록 주제는 바꿨어도 관련 주제로 소르본에서 세미나가 있었을 때 이 학자의 논문 덕에 질문을 해볼 수 있었고 아마 그 때문인지 그 ..

신변잡기 2023.10.23

20231015_計

바람이 세차게 불던 밤이 지나고 일어나니 공기에서 겨울의 냄새를 미리 맡아볼 수 있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어느덧 만성절이 손 뻗으면 감촉할 수 있을 정도 만큼 가까이 왔다. 작년에는 개강 후에 만성절 방학을 맞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은데 올해의 감각은 사뭇 다르다. 학기의 시작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다르기 때문일까? 시월이 지나면 정말로 해야 하는 일들이 모두 마무리된다. 약간 걱정되는 것은 박사 등록 문제인데 아마 별 일 없이 잘 지나갈 것이다. 잔가지를 솔질하는 일이 계속 남아 있겠지만 굵직한 것들은 모두 끝내둔 채로 십일월의 만성절 방학에는 이번에도 또 어디론가 다녀오고 싶다. 지난 주에는 아주 불쾌한 일이 있었지만 적어도 내 마음속 소요는 쉬이 가라앉힐 수 있었고 지금은 잘 ..

신변잡기 2023.10.16

20231001_計

베이킹에 자꾸 실패해서 과연 무엇이 문제인지 몇 가지 가능성을 검토해보았다. 1. 오븐의 출력이 부족해서 2. 냉장고 성능 탓에 반죽을 1시간 휴지해두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3. 엉뚱한 종류의 밀가루를 사용해서 4. 계량을 잘못해서 5. 반죽을 제대로 안 해서 예열도 충분히 하는데 빵이 제대로 부풀지도 않고 쿠기도 제대로 구워지지 않는다. 다음에 한 번 더 시도해보고 그때도 안 되면 무언가 제대로 된 대책을 강구해봐야겠다. 눈이 침침해서 노트북으로 장시간 작업하기가 어려워서 스탠드 등을 하나 장만했다. 아주 마음에 든다. 잘하면 올해 안에 턱걸이 10회 달성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

신변잡기 2023.10.02

20230924_計

Seasons Changing Broccoli, you too? · Song · 2010 open.spotify.com 이번 주에 있었던 손에 꼽을 쾌거라면 역시 좋은 성적으로 논문 심사를 통과한 것이다. 목표했던 성적보다 훨씬 더 높은 점수를 받은 덕분에 늘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습관 탓에 어쩌면 장학금 기준에 맞춰 좋은 점수를 주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작은 의구심이 이번에는 피어날 여지조차 생기지 않았다. 이번 심사는 좋은 결과를 차지하고도 무척 고무적인 경험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나의 학업에 정확하고 건설적인 평가를 받을 기회가 무척이나 적었다. 하지만 얼마 전 심사에서는 지도교수 선생님과 심사위원 두 분 모두 내 논문을 매우 꼼꼼하게 읽고 그에 대해 정성스러운 코멘트와 질문 그리고 조언을 해주셨다...

신변잡기 2023.09.25

20230917_計

L’Amour, Les Baguettes, Paris Stella Jang · Song · 2021 open.spotify.com 나에게 파리라는 도시는 전혀 서정적인 장소가 아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 도시는 나에게 환희를 일으키기도 비탄에 젖게 하지도 않는다. 파리는 그저 나에게 하나의 행정구역일 뿐이다. 여느 곳과 다를 것 없는 하나의 도시일 뿐이다. 다만 나에게 아무것도 더 정확히 말해 내가 바랐던 그 어떤 것도 내어주지 않은 도시이다. 어쩌면 긴 시간의 후회와 상실의 시간이 흘러간 공간이 마침 파리였다는 사실이 나에게서 이 도시에 대한 모든 감상을 벗겨내어 나를 이 도시에 완전히 무감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나는 파리의 서정성을 노래하는 모든 사람을 의심..

신변잡기 2023.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