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잡기

20231105_計

RenaCartesius 2023. 11. 6. 05:08

여독을 음주로 풀면서 이번 주와 이번 주의 여행을 갈무리하는 글을 쓴다. 

 


 

평소에는 계획이 틀어지거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상에 개입하는 것을 정말 끔찍하게 싫어하지만 여행 도중에는 우연의 질서 속에 나를 맡기려고 하는 편이다. 정해지지 않은 흐름을 따라 가는 것이 여행지에 얕게나마 녹아들어갈 수 있는 방법인 것 같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어느 한 도시에서 정말 특별한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그 여행으로부터 거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 했다. 그래서 나는 무척 오랜 기간 동안 여행은 단순히 장소의 이동 즈음에 불과하다고 여겼고 그래서 나는 여행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었다. 사실 딱 한 도시에서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 일은 그다지 많지 않은 법이라 나에게는 사람들이 여행에 가서 하는 대부분의 일들이 어디에 있든지 할 수 있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빡빡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에서 느끼는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을 조금은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여행자는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여행에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미리 알아보지 않고 아무 식당이나 내키는 대로 들어가거나, 트람을 타고 끝에서 끝까지 도시 경관을 둘러보거나, 헌책방엘 가거나, 동네 cave에서 와인을 한 병 사거나, 영화를 보는 일 등등. 

 


 

디종의 영미서적 전문 헌책방 Burgundy Bookworm'에서 산 에밀리 디킨슨 시집과 리옹의 'Diogène'에서 구매한 지금은 절판된 'Cahiers Spinoza' 1권

 

 

여행의 마지막 날, 파리로 돌아가기 전에 들린 디종에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추운 몸을 이끌고 헌책방에 들어간 나에게 서점 주인은 차를 내주었고 결국 나는 이제는 가급적 책을 사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에 거슬러 디킨슨의 시 전집을 구매했다. 친절에 답하고 싶은 마음과 또 유학을 나오기 전 꽤 공들여 읽었던 디킨슨의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의 가장 오래 남을 기념품이 아닐까.

 


 

Et vous, comment vivrez-vous ?

 

리옹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았다. 조금 난해했다. 현실의 갈등을 조금 더 길게 조망했다면 좋았을 텐데 어느 순간 탑 속의 이야기로만 가득 채워졌고 오타쿠를 경멸하는 평소의 미야자키와 달리 이상하리만치 이런 저런 설정과 상징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은 '아름다운 영혼'(a.k.a. 오타쿠)을 싫어하는 그답게 영화는 탑 속에서 벗어나는 결말로 끝이 난다. 탑 속에 계속 머무르며 그 세계의 견고한 정합성을 유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세계가 아름답든 추하든 결국은 허구이기에 현실의 갈등을 해소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매혹적인 환상보다는 지저분한 노동이라는 것. 다만 책 바깥의 세상으로 나온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책 속의 인물과 친구로 남을 수도 있으며 책의 세계에서 나왔더라도 그 세계의 파편 정도는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오랜 세월 미야자키가 반복해왔던 메세지. 

 

그래서 이 영화를 두고 미야자키가 결국 다이쇼 로망에 빠졌다거나 제대로 된 군국주의 비판을 하지 못하고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있다는 평이 오가는 것이 평이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주변화되는 인물들의 계급성에 관한 지시가 꽤나 노골적이고도 꽤나 빈번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탑을 이어받지 않고 그 밖으로 나오는 선택을 했음에도 말이다. 물론 현실을 바깥으로 나오는 계기가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라는 사실은 꽤 고답적인 측면이 있고 지브리가 가진 에코 페미니즘의 뻔함과 뻔뻔함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게다가 히미에게는 확고한 위치와 역할이 그나마 정해져 있었던 반면 미래 세대에 해당하는 주인공이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 지 아무런 단서조차 없이 영화가 끝난다는 점에서 이제는 무척 지루해진 열린 결말의 한 패턴을 보게 된다. 이것은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해서 안노 히데야키나 일본 애니메이션 작가들이 더 나아가 모든 현대의 사상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좌든 우든 모두 현 시대의 흐름을 비판하지만 정작 미래에 어떤 규범을 세워야 하는지 혹은 앞으로 세워질 규범의 타당성을 검토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지 내놓은 사람 혹은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무척이나 적고 또한 그 소수의 답조차 정답인지는 무척 의문스럽다. 하지만 창작자에게, 적어도 이번에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내놓은 미야자기 하야오에게, 이러한 규범성의 질문에 답을 해야 할 정치적이거나 윤리적인 의무는 물론이고 미학적 의무 또한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답은 이제는 원로 세대에 속하는 하야오가 내놓을 수도 없고 내놓아서도 안 되며 오직 앞으로의 세대만이 스스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답이든 오답이든 말이다. 노인은 그저 자신이 물려받은 어떤 한 가지 가능성을 이야기의 형태로 다음 세대에게 전해줄 뿐이다. 그 미약한 가능성을 믿기 때문에 미야자키는 지금까지 작품 활동을 해온 것이 아닐까. 

 

난해하다고 말했지만 그건 애써 영화를 읽으려는 나의 시선으로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린 아이에게는 이 영화가 어떻게 보일까. 한층 더 새로워지고 발전한 연출 기법에 매혹되어 우선은 미야자키가 보여주는 세상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으로 시작하게 됐을 지도 모른다. 어릴 적 아빠가 어디에선가 얻어온 '이웃집 토토로'의 비디오 테이프를 나는 수차례 돌려보았고 그런 나를 위해 엄마는 동네 극장으로 나를 데려가 '센과 치히로의 모험'을 보여주었다. 미야자키의 전성기 시절에 그의 작품을 보며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크나큰 행운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영화 관람 이후 새를 마주칠 때마다 괜히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속으로 외친다. 새는 답을 하지 않는데도. 

 


 

겨울이 되면 나는 이 계절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는 기형도의 시 구절을 되뇌이며 걷곤 한다. 중세 소도시에서 리옹으로 돌아온 나는 어둑해진 거리를 걸었다. 지나친 어둠. 저녁을 먹기 위해 어느 정도 번화가일 거라 생각했던 거리로 나갔던 나는 예상치 못한 적막함에 당혹스러웠다. 짙은 어둠과 페라슈 역의 복잡한 건물의 구조 탓에 길을 잃어 빙빙 돌아다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 괴기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다시 한 번 겸손함을 배웠다.

 


 

 

작년 이맘때 즈음 슈투트가르트에서 돌아왔을 때는 여행 직전에 불이 나간 형광등을 교체하는 것으로 일상을 재개했다. 많이 걸은 만큼 작년보다 얻은 것도 느낀 것도 생각한 것도 많았던 이번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와인을 통해 하루 연장한 여행을 글을 쓰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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