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잡기

20231119_計

RenaCartesius 2023. 11. 20. 06:06
They are ill discoverers that think there is no land when they can see nothing but sea
   ― Francis Bacon

 

『학문의 진보』에 나오는 말. 교수님은 'see'와 'sea'의 대구를 강조하셨다. 베이컨의 의도는 학문 탐구에서 열린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겠지만 곧잘 나의 연구 혹은 나의 삶을 망망대해를 떠도는 이미지로 표상하는 나에게 이 말은 약간의 위로를 주기도 한다. 손에 잡히는 무엇인가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편향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서는 안 된다. 

 


 

오늘 반나절은 침대와 선반 조립을 하는 데 바쳤다. 이케아 조립은 그 자체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유익한 노동처럼 느껴지는데 확실히 몇 번 반복하다보니 실력도 느는 것인지 이전보다 더 적은 시행착오로 조립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보다 애를 먹기도 했다. 이전에 조립했던 책장이나 행거와 달리 침대는 원래는 두 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는 꽤 머리를 잘 굴려서 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이전 침대를 마당에 내놓고 다른 가구들의 이런 저런 배치를 바꾸느라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다. 꽤 이른 아침부터 조립하기 시작했는데도 다 마친 뒤에 뒷정리하고 청소했더니 어느덧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간단히 차려 먹고 이전에 개조식으로 필기했던 케르베강의 강의를 줄글로 정리했다. 이제 일주일의 기록을 작성하고 와인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아무튼 새로 산 침대는 아주 마음에 든다. 유럽에 와서 누운 침대 중에 가장 좋다. 수면의 질이 개선되리라 기대한다. 

 


 

어제는 오전에는 박사 동료의 논문심사, 그리고 오후에는 베이싸드 관련 컨퍼런스, 이렇게 두 곳에 참여하느라 바빴다. 논문 심사의 분위기는 꽤 살벌했는데 이미 다음 달 소르본 스피노자 세미나에서 발표가 예정되어 있고 논문 출판도 계획되어 있는 것 같은데도 심사위원들의 비판의 예리함은 결코 호락호락하게 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언젠가 내게 날아오는 그 칼날들을 잘 '디펜스'할 수 있을지.. 

심사장에서 자케 교수님의 일본인 제자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유일한 동양인 제자였기에 누구인지 늘 궁금했다. 일본에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파리에 있다고 한다. 연락처를 교환했고 곧 한 번 만날 것 같다.

컨퍼런스에서는 Marcos Gleizer를 만났다. 요 며칠 있었던 행사에서 굉장히 여러 차례 마주쳐서 그런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사실 Gleizer는 지난 5월 스피노자 세미나 발표자였는데 그때 내가 질문을 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 관련 주제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그때 내가 언급했던 논문을 메일로 보내주기로 했다. 한국 지도교수 님과 마찬가지로 베이싸드 밑에서 학위를 하신 분이라 혹시 기억이 나는지 여쭤봤는데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K 교수님의 얼굴은 아는 것 같다고 했다. 

또 컨퍼런스 발표자였던 모로 선생님에게 끝나고 사적으로 질문을 했다. 사실 이미 몇 번 많이 귀찮게 한 거 같아서 그리고 심사장에서의 그 무서운 모습이 떠올라서(...) 망설였는데 결국 또 얼굴에 철판을 쓰고 얼마 전 블로그에도 포스팅한 'jus'와 'lex'의 관계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려면 어떤 참고문헌을 보면 좋을지 여쭤보았다. 친절하게도, Michel Villey의 Leçons d'histoire de la pensée juridique moderne을 읽어보라고 적어주셨는데 막상 집에 와서 찾아보니 검색해서 나온 것은 Leçons d'histoire de philosophie du droitLa formation de la pensée juridique moderne이었다. 두 권의 책 제목이 적절하게 합쳐진 셈이어서 둘 중 어느 책을 추천하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 읽어봐야지 뭐 별 수 있겠나. 

 


 

박사 1년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내가 어느덧 스피노자의 원전과 부지불식 간에 꽤 멀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M2 과정 동안 교수님의 지도를 받으며 느낀 것은 '남들이 하지 않은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피노자 텍스트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이 서있지 않은 지금의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의 연구서를 읽어봐야 크게 내 연구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당분간은 스피노자를 비롯한 철학자들의 원전을 읽고 또 규범성을 주제로 법철학의 주요 흐름을 공부하려고 한다. 그 흐름을 죽 따라가다보면 법학을 전공해야 할지 아닐지에 대한 판단도 설 것이다. 어쩌면 내년에는 정말 방통대 법학과에 등록할 수도 있겠다. 


 

 

재수가 없는 날에는 궂은 일이 연달에 발생한다. 프랑스에 온 뒤 처음으로 집 열쇠를 방 안에 두고 나와버렸다. 세미나 촬영 도중에 갑자기 촬영이 중단되어 5분 정도 기록이 비어버리게 되었고 세미나 뒷풀이로 간 식당은 예약을 받아놓고도 확인을 안 해서 결국 다른 식당을 찾아야 했다. 뒷풀이 자리에서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었으나 또 한 번 피곤한 말을 들었고 그리하여 또 한 번의 역설적인 안도감을 느꼈다. 

 


 

오전에는 잠에서 깬 뒤에도 다소간 몽롱함이 지속된다. 차분히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졸음과 함께 꿈속의 허망한 생각과 연상들 그리고 잠들기 전에 마구잡이로 떠올랐던 공상들―"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라기엔 정말 그 생각들을 '내가'한 것인지 아주 의심스러울 정도이다―을 잠재운다. 그렇게 꿈이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 다시 꿈으로 돌려보내고 나면 현실로 돌아와 일상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A가 X에게』를 다 읽었다. 심심하고 지루한 일상을 정성들여 상세히 적어 둔, 게다가 내가 아닌 다른 수신인이 있는 글을 읽는 일은 역시나 좀 따분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아이다의 일상은 꽤나 존 버거의 세계관 속의 전형적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 때문에 비록 존 버거가 이 소설이 아이다가 하비에르에게 보내는 편지를 편집 없이 내보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아이다는 너무나도 존 버거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처럼 느껴지고 만다. 아마 그 때문에 첫 독서가 더욱 건성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다. 하지만 다시 읽을 때는 왜 존 버거가 이런 인물을 만들었을지 생각해보는 데 약간의 재미를 얻었다. 특히 왜 하필 아이다를 약사로 설정해야 했던 필요가 있었던 것인지,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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