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잡기

20240331_計

RenaCartesius 2024. 4. 1. 04:09

짧은 프랑크푸르트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도착한 날, 집세 인상을 알리는 편지가 나보다도 먼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이 두 번째인 프랑크푸르트는 약간은 익숙하고 그 익숙함에도 약간은 낯선 그런 이중적 느낌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관광이라고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이번 여행 때는 지난 번에도 들렸던 슈테델 미술관과 다시 방문할 때를 위해 남겨두었던 젠켄베르크 자연사 박물관에 갔다. 

 

슈테델 미술관은 괴테가 반겨주는 곳이다. 첫 방문부터 나는 이 미술관을 아주 인상 깊게 관람했다. 미술관의 공간성을 이곳보다 더 잘 체험할 수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쓸쓸함 속에 충만함을 느끼며 문득 나는 나 혼자서 두 번이나 오게 된 이 슈테델 미술관에서 그를 통해 그와는 이곳에 온 적이 없음에도 보는 방법을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그에게 이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젠켄베르크 자연사 박물관은 22년에 프랑크푸르트를 들렸을 때는 여러 일정을 소화하느라 지친 탓에 그리고 '어차피 브라키오사우르스의 화석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라는 이유로 다음을 기약하며 굳이 들리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과연 무엇을 믿고 다음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같은 도시에 두 번이나 여행을 오는 경우는 그것도 그 도시가 해외에 위치한다면 굉장히 드문 일인데 말이다. 마치 우리 모두 자신의 죽음의 가능성에 관해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지만 그 가능성을 고려하여 계획을 짜지는 않는 것처럼 나는 무턱대고 언제든 프랑크푸르트에 다시 충분히 보러 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보다. 예전에는 여행지에서 부러 여러 곳을 돌아다는 것이 싫었고 이해하지도 못 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어떤 도시에 딱 한 번만 갈 수 있다면 그 한 번으로 영원히 그 도시에서의 나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면 조금이라도 더 걷고 더 보고 더 듣지 않겠는가.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일회적이다. 원리적으로 다음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닐 지라도. 인생이 단 한 번 사는 일인 것처럼. 다음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조금 더 자각한다면 이번 한 번이 영영 영원이라면 어쩌면 허투로 낭비하는 것들이 조금은 줄어들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어떤 일이든 일찍 물러나려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영원회귀의 사유와 함께 이제는 조금 달라져 보기로 마음 먹었다.

 

아무튼 자연사 박물관은 살아있는 생명체보다는 차라리 죽어 있는 화석을 보는 것을 더 선호하는 나에게 자연사 박물관은 어찌됐든 둘러보는 즐거움을 주는 장소이다. 파괴되고 파편만 덩그러니 남아 유실된 부분을 채워넣기 위해서는 감상자의 상상력이 필요한 한때는 살아있었던 전시물을 보는 일은 그리하여 슬플 수밖에 없고 또 그리하여 즐겁기 마련이다. 

 

돌아오는 열차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독서를 끝마쳤다. 기세를 타지 못한 탓에 번번이 중단되어 꽤나 길어졌던 여정의 마무리를 지었다. 소설의 결말은 영 깔끔치 못 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읽고난 뒤의 느낌이 개운치가 않다. 이반의 운명을 더 자세히 알지 못한 채 소설이 끝나버린데다 원래 저자가 쓰기로 계획했던 후속 작품이 더 이상 나올 수 없기 때문일까. 무엇보다 어째서 일류셰치카의 장례식으로 에필로그를 끝맺었는지 잘 모르겠다. 사실 일류샤 관련 에피소드를 나는 특히 지루하게 여겼는데 이 부분이 소설 전체 내에서 무언가 외따로 떨어져 있고 그렇기에 다소 불필요한 잔가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일류샤의 장례식 장면이니 ―게다가 3권의 시작도 일류샤 에피소드이다― 내가 무언가 대단히 중요한 지점을 조금도 파악하지 못한 채로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찝찝함이 가시지 않는다. 도스토옙스키가 전체 서사의 전개에 필수적이지 않은 위성 사건을 억지로 그것도 미챠와 카챠의 만남으로 소설을 끝내지 않고 에필로그의 제일 마지막에 집어넣었을리 없다. 어쩌면 미챠에게 오심의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일류샤 에피소드에 조금 더 주목해봐야 하지 않을까. 조금 더 생각해볼 일이다. 

 

드니 빌뇌브의 ⟨듄 2⟩를 보았다. ⟨컨택트⟩ (원제: 어라이벌)도 그렇고 빌뇌브는 인간의 인식 수준을 넘어서 전지함을 가지게 된 주체에게 행위자성이 여전히 있는지에 관한 물음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것 같다. 과거를 통해 미래까지 속속들이 안다면 과연 그런 주체에게 현재는 무슨 의미를 지닐 것인가? 물론 이에 관한 우리의 상상력은 꽤나 진부한 것이다. 다가올 미래를 위한 길을 착실히 예비한다는 영웅의 모습을 마치 다크 히어로처럼 그려낼 뿐이다. 우리는 어째서 비인간적이고 초인간적인 일을 인간적인 방식으로밖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을 새로이 그리고 오랜만에 만났던 한 주였다. 이전에 몇몇 사람과 갔던 식당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또 혼자 갔던 카페를 여럿이서 가보았다. 처음 해보는 ―적어도 내게는― 고난이도(?)볼더링 문제를 풀어보았고 아직도 몸이 조금 뻐근하다. 선물 받은 곤드레로 솥밥을 지어먹었다. 몬테크리스토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의 음악을 새로이 발견했다. 

 

4월이다. 엘리엇은 사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라 했으나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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