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쇄지담

글쓰기와 경험

RenaCartesius 2023. 9. 8. 08:41

한 편의 글을 끝냄과 동시에 모든 것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글쓰기의 경험과 함께 내 삶의 특정한 시기로 묶기에 충분한 어느 경험의 연속체 속에 間斷이 도입되었다. 종료된 시기, 다시 말해서, 이곳에 오기로 결정했을 무렵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간만큼 나 자신의 경험에 관해서 여러 가지 방식을 실험해보며 글로 남긴 시기는 여태까지의 생애 전체를 놓고 보아도 드물 것이다. 그 이전에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에 대한 글쓰기를 회피해왔으며 여전히 글쓰기는 꽤나 겸연쩍은 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계속 무엇인가를 썼던 까닭은 그것 외에는 모든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모든 것이. 글은 읽히지 않았고 사람들의 말도 그것이 모국어이든 외국어이든 나는 들을 수 없었으며 응당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나 외의 다른 대상은 모두 잃어버렸다. 

 

절친한 친구를 떠나보낸 뒤 대화 상대를 잃어버린 몽테뉴는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를 시도했다. 원래라면 수신인에게 말로든 글로든 전달했을 내용을 그는 어떠한 유례 없는 형식으로 기록하기로 했다. 그러한 기록에 몽테뉴는 '시도(essai)'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쩌면 나 역시 원래는 말로 했어야 했던 무엇인가를 혹은 명확한 수신인이 있어야 했던 무엇인가를 그 앞에서 직접 말할 수 없었기에 계속 써내려가야만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약속되었던 대면의 순간은 유예되고 취소되었으므로. 그리하여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렸으며 사적인 비망록을 가장하여 전할 수 없는 말과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나에게서 누구에게도 누구에게서도 나에게로 교통하는 것이 없었으므로 나의 경험을 쓰는 일은 온전히 나만의 일이었다. 일기를 쓸 때는 필요 이상으로 비장해지기 마련이라는 어디에선가 접한 말대로 나는 글을 쓰며 짐짓 위선도 위악도 부려가며 나의 경험을 쪼개고 부수고 또한 덜어내고 그렇게 감추고 결국 그런 식으로 나는 경험을 가공해냈다. 내가 경험의 덩어리를 펜촉으로 옮겨두기 위해 그 모형의 평행투시도를 작도하는 과정에서 경험은 여러 층위로 분화되었고 원래의 경험체에는 없던 새로운 차원이 생겨났다. 요컨대 나의 경험은 글쓰기를 통해 박제되고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의 경험과 용접되어 아예 다른 경험으로 변형된 채 굳어졌다. 그렇게 나의 주관은 딱딱해진 사물이 되어 타인들이 들여다보기도 하고 만지고 움켜쥐기도 하였다. 어떤 이들은 낚아채어 달아나기도 했다. 글쓰기의 노동을 통해 획득한 확장된 나라고 할 수 있는 글들은 곧 나의 재산이었다. 나의 재산이 도둑맞아 빼앗기는 일이 반복되었을 때 나는 그 글의 원천인 나 자신조차 완전히 소모되어 버리고 만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도둑맞은 편지는 결국 수신자에게 도달한다는 말은 역시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글쓰기의 행위 자체와 그를 둘러싼 그 모든 일련의 일들로 변한 것이 있다면 경험은 글이 되어 나만의 기억이 아니게 되었고 독점적 소유권을 잃었다는 점에서 나는 지난 날의 시간을 잃어버린 것만큼이나 기억도 잃어버린 셈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기억을 가져간 사람에게 그것이 좋은 것일지 나쁜 것일지 혹은 기억될 만한 것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설령 그 당시에 기억될 만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필히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타인의 일은 쉽게 망각된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지난 날의 도난 사건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 경험을 지금의 이 글로 옮겨둠으로써.

 

그런 시간을 딛고 무언가 스스로도 납득할 수 있는 결과물을 냈다. 한동안 그것 외에는 쓸 수가 없어서 써왔던 글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원래 내가 썼던, 그리고 써야 했으며, 당연히 써내야 하고,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종류의 글을 썼다. 나는 적어도 당분간은 여전히 그 글을 두고 씨름해야 한다. 그 글 속에 나의 사적 경험 따위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글에서 나는 '나'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라고 말한다. 내가 제출한 형식의 글에서 1인칭 복수 대명사의 사용에는 여러 가지 함의가 있지만 적어도 내게는 누군가 "우리는 우리가 영원하다는 것을 느끼고 경험한다(sentimus experimurque nos aeternos esse)"라고 말할 때 혹은 글로 썼을 때의 '우리'를 의미한다. 

 

인간이 죽으면 우리의 영혼의 가장 나은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파괴된다. 즉 상상력이 관장하는 부분은 지워지고 그렇게 감각과 기억은 잊혀진다. 그렇다면 영원성의 경험은 기억이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래 전부터 반복해서 써왔던 문장이 기억난다. 잊어도 상관 없다면 잊고 싶다고. 그러나 잊지 않고자 글을 쓰던 시절이 지나갔다. 두 눈을 부릅뜨고 사물을 지켜보지 않으며 돌아섰을 때 그 순간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고 안절부절하는 영혼들을 구제하기 위해 전능한 신을 覺者로 삼은 어느 섬나라의 대주교는 자신의 뒷모습을 상상해야 하는 이의 마음을 알았을까. 

 

어느 날 우체국으로 나를 소환하는 편지를 받았다. 우체국에서 보관 중인 편지가 있으니 찾아가라는 편지였다. 어쩌면 나는 그토록 기다리던 편지가 아닐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걸음에 달려갔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는 傳喝은 밀린 보험료를 내라는 청구서였다. 내가 직접 가입한 보험이 아니였다. 이 집을 내 명의로 계약하면서 집주인이 보험에 들어두겠다는 언질을 주었던 기억은 났다. 하지만 내가 돈을 내는 것이었나? 집주인에게 편지를 했고 내가 내는 것이라는 답을 받았다. 나는 이 일을 삶의 지독한 알레고리로 받아들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사람들과의 관계에 좌절하고 그로부터 소외되었다고 해서 혹은 그렇다는 피해 망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고백록』 같은 작품을 쓰고자 시도하지 않는 법이다. 어쩌면 이 사례 하나만으로도 한 사람의 글을 그 사람의 경험으로 모조리 환원하는 시도는 부당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언어는 투명하지 않으며 발화자의 마음도 투명하지 않고 수신자의 마음은 더욱 불투명하다. 글쓰기는 더욱 혼탁하다.

 

'이해하는 자에게는 한 마디면 충분하다(intelligenti dictum sat est)', 그러나 말이 충분하지 않을 때 우리는 글을 쓴다. 나는 앞으로도 글을 쓸 것이다. 나의 삶이 나에게도 이해되지 않으며  나의 삶을  타인에게 이해시킬 수도 없다는 이중의 불가능성 때문에 그리고 나는 내세울 수 있는 무기라고는 '말과 정신' 뿐인 사람이라는 이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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