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기록

Pierre Macherey, Judith Butler et la théorie althussérienne de l’assujettissement 정리

RenaCartesius 2024. 2. 4. 08:30

 

우리는 이데올로기가, 우리가 호명(interpellation)이라고 부르는 아주 정확한 이 작용을 통해, 개인들 가운데서 주체들을 “징집하(recrute)”거나(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모두 징집한다) 혹은 개인들을 주체로 “변형시(transforme)”키는(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모두 변형시킨다) 그러한 방식으로 “움직이(agit)”거나 혹은 “기능한다”라고 연상하는데, 우리는 이 호명을 매일 벌어지는 가장 흔해 빠진 경찰의 (혹은 경찰이 아니더라도) 호명 유형으로 재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이, 거기 당신!” (주석: 일상적으로 실천되는 정확한 의식에 복속된 호명은 “수상한 자(suspects)”를 호명하는 경찰 호명의 실행에서 아주 “특별한” 형태를 취한다) 만약 우리가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상상된 이론적 장면을 가정해본다면, 호명된 개인은 뒤돌아선다. 이 단순한 180도의 물리적 전회를 통해 그는 주체가 된다. 어째서? 왜냐하면 그가 호명이 “바로(bien)” 그를 향했다는 것을, 그리고 (다른 자가 아니라) “호명된 것이 바로 그였다”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경험은 호명의 실천적인 원거리 통신들(télécommunications pratiques)이 호명이 그의 사람을 결코 실천적으로 놓치지 않는 그러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 언어적 부름 혹은 호각 소리, 호명된 자는 언제나 호명됐던 것이 바로 그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는 무척이나 기이한 현상이며 많은 사람들이 “자책할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단지 “죄책감(sentiment de culpabilité)”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작은 이론적 극장을 간편하고 분명하게 제시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전과 이후가 있는 한 시퀀스의 형태 하에서, 그러므로 시간적 연속(succession)의 형태 하에서 사태를 나타내야 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se promènent) 개인들이 있다. 어딘가에서 (일반적으로 그들의 등 뒤에서) 호명이 울린다 : “어이, 거기 당신!” 개인은 (90%는 겨낭되었던 자이다), 그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믿으면서-의심하면서-알면서, 그러므로 호명을 통해 겨냥된 것이 “바로 그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돌아선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태는 어떠한 연속적 계기(succession)도 없이 일어난다. 이데올로기의 실존과 개인들의 주체로의 호명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다. (L. Althusser, « Idéologie et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notes pour une recherche) » in Positions, éd. Sociales, 1976, pp. 113-114)

 

  알튀세르는 그의 텍스트들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고 가장 자주 분석된 텍스트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는 이데올로기 일반의 이론을 구성할 수 있는 실험적 가설로서 제시되었다고 고백(avouer)한다. 덧붙여 그는 이 텍스트를 꼼꼼한 동시에 느슨하게 독해할 것을 주문한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가설로서 제시된 것이기에 그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꼼꼼히 읽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어디까지나 가설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이론을 완전히 받아들일 필요도 그래서도 안 된다는 의미에서 느슨하게 읽어야 한다.

 

  주디스 버틀러가 『권력의 정신적 삶』의 4장 「양심(conscience)이 우리 모두를 주체로 만든다. 루이 알튀세르의 호명」에서 전개하고 있는 분석은 이 텍스트에 대한 꼼꼼한 독해에 해당할 것이다. 버틀러는 흥미롭게도 알튀세르가 『자본을 읽자』에서 발전시킨 “증상적 독해(lecture symptomale)”의 방법을 알튀세르의 텍스트 자체에 적용시킴으로써 그의 글로부터 그가 생각하지 않은 것(impensé)를 포착하고자 시도한다. 증상적 독해란 한 텍스트로부터, 그것이 말하고 있는 것의 이면 혹은 텍스트가 말하지 않는 것, 그러나 그 텍스트에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의 “증상”을 구성하고 것을 식별해내는 특수한 절차를 일컫는다.

 

  버틀러의 증상적 독해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그 자신의 가톨릭적 배경으로 인해 이데올로기 일반의 이론을 구성하고자 시도하면서 결국은 여러 유형의 이데올로기들 가운데 매우 특수한 형태에 해당하는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관한 이론을 구성하는 데 그치고 있다. 요컨대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은 종교적 패러다임 위에 기초한다. 그의 이론적 극장에서 펼쳐지는 경찰관의 호명 장면은 구약 속 모세가 부름받는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

→ 하지만 마슈레는 호명 이론이 지니고 있는 종교적 특색이 적어도 알튀세르의 개인적 요소가 반영되어 나타난 결과라고만은 확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는 종교, 더 정확하게는 기독교를 모델로 이데올로기 이론을 전개해 왔기 때문이다. 포이에르바흐는 기독교의 본질이 인간의 본질이 소외된 결과로 보았으며 마르크스는 이러한 포이에르바흐의 기독교론으로부터 이데올로기 개념을 발전시켜 이데올로기란 사회적 관계의 총체에 대한 거꾸로 선 이미지로 고려한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사유의 흐름은 『자본론』에서 상품 물신에 관해 분석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알튀세르는 포이에르바흐와 마르크스 사이의 관계에 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므로 당연히 마르크스주의 내 이데올로기 이론과 기독교 종교 사이의 이러한 연관성에 관해서 알고 있었다. 따라서 종교 모델로 이데올로기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 알튀세르의 개인사적 문제로 인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종교적 패러다임에 입각한 접근법의 타당성 역시 조금 더 신중하게 검토해볼 문제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버틀러는 호명 이론이 종교적 권위에 대한 신성화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특징으로 정의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 이데올로기에 대한 복종은 절대성의 차원에서 이뤄진다. 즉, 이데올로기의 호명은 결코 위반할 수 없는 신적인 초월적 법칙에 대한 부름으로 여겨진다. 둘째, 호명받은 주체에게 그 호명에 응답하는 것은 일종의 의무로서 주어진다. 그렇다면 주체는 왜 호명에 응답하는가? 알튀세르는 지나가면서 죄책감에 관해 언급한다. 버틀러는 죄책감이 주체화 과정에서 맡는 역할에 주목하여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에 따르면 양심이 곧 우리 모두를 주체로 만든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버틀러가 보기에 이러한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은 이데올로기가 주체의 절대적 복종을 반드시, 자동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이끌어 낸다고 결론 내림으로써 도리어 이데올로기의 권위를 과장되게 평가하는 우를 범한다. 버틀러는 이러한 한계를 비판하고 호명 이론에서 주체화 혹은 예속화 과정에 대한 많은 지점이 해명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문법적 논증을 시도한다. 만약 알튀세르의 가설대로 이데올로기의 호명에 의해 주체가 생성된다면 이 호명을 겨냥하는, 이 호명을 자기 자신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여, 이 호명에 응답해야 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누군가’는 과연 누구인가? 알튀세르에 따르면 바로 주체 자신이겠지만 호명에 응답하기 전에 이 주체는 아직 주체가 되기 이전의 정체화되지 않은 무엇인가이다. 그러므로 주체화/예속화 과정에서 주체가 되기 위한 변화를 겪는 이 미지의 존재가 주어 자리에 놓인“X가 주체가 된다”라는 문장에서 X의 항을 채워넣을 필요에 따라 알튀세르는 (궁여지책으로) ‘개인들’(individus)을 집어 넣었다. 그러나 버틀러는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이 주체가 되기 이전의 주체와 동일한 것으로서 무엇인가를 전제해야 하는 순환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이러한 문법적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이 논증의 공격 범위를 상대화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가 단순히 호명 이론의 결함내지는 그것이 설명하지 못하는 공백이라기보다는 어떤 점에서 주체의 형성 과정을 서술할 때 문법과 존재론 사이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법은 늘 주어의 자리를 요구하지만 그 자리를 채워야 할 주체는 자기 자신을 서술하는 이야기 자체로부터 사후적으로 발생한다.

→ 그러나 마슈레는 버틀러의 문법적 논증에 관해 두 가지 비판을 제시한다 :

첫째로 버틀러가 고려하는 자기-서사를 통해 형성되는 주체화 과정은 알튀세르가 호명 이론에서 고려하고 있는 과정과 상당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버틀러는 어떤 점에서 주체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정확한 방법으로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는 리쾨르의 입장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단순한 180도의 물리적 전회”를 통해 호명된 개인이 주체가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알튀세르가 그려내는 주체화 과정은 버틀러-리쾨르 식의 자기 서사를 통한 주체화 과정도 아니며 구약 속 모세처럼 신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신의 종복(subject)가 되는 형태의 주체화도 아니다. 알튀세르는 주체화 과정 속에서 신체적이고 물질적인 요인을 고려하고 있는 셈이다. 파스칼의 말처럼 무릎 꿇게 되기 위해 믿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반대로 무릎 꿇음이 우리가 믿음을 가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요컨대 알튀세르가 고려하고 있는 것은 부르디외가 “실천감각(sens pratique)”이라고 부른 것을 신체에 새기는 과정을 통해 특정한 행동규범을 갖추게 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버틀러의 문법적 비판은 효력을 지니지 않는다.

둘째로 알튀세르가 그려내고 있는 주체화 과정을 꼭 문법적 형식으로부터 어긋난 것으로 해석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주체화 과정을 서술하는 문장의 주어가 비인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인격적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일어나는 주체 형성의 과정, 이것이 바로 알튀세르가 “주체 없는 과정(processus sans sujet)” 개념을 발전시키면서 사유했던 것이다. 주체는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다. 미리 있어야 할 것으로서 주체를 전제하지 않은 채 특정화 과정 속에서 발생한 결과로서 주체를 사유하는 이러한 탈주관화된 방식이 알튀세르가 보기에 진정으로 유물론적인 철학이 지향해야 할 것이었다.

 

  버틀러의 문법적 논증에 대한 이러한 알튀세르적 입장의 재반박에 근거하여 마슈레는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을 그것이 주체의 자동적 복종을 전제한다는 비판으로부터 구제하고자 시도한다. 이 시도는 과연 “주체 없는 과정”이 어느 정도까지 비주관적일 수 있는지 검토하는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사회적 힘에 의해 주체로서 훈육되는 개인들은 정말로 아무런 독자성도 지니지 못한 채 자신에게 부과되는 압력을 타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사회에 포획될 수밖에 없는 고깃덩어리란 말인가? 주체화 과정에서 주관의 역할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가? 마슈레는 마르크스의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 개념을 환기하면서 “사회”란 단일한 것이 아니라 그속에는 경합하는 다양한 역관계들이 이미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주체화 과정 이전에 실존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이 총체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주체가 발생할 수 있으며 물질적 실재에 기초하는 각각의 이데올로기들이 서로 경합하고 있기에 어느 한 이데올로기의 호명이 절대적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주체화는 단순히 개인에게 특정한 규범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단조로운 과정으로 요약될 수 없으며 그와 반대로 길항하는 세력들이 경쟁하는 역동적 과정을 통해 주체가 생산된다고 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순수하게 주체에 내밀한 것과 주체 바깥의 무엇인가의 구별은 사라지며 주체는 그러한 내∙외부의 명확한 경계 없이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작용받기도 하는 사회적 역관계 속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마슈레가 보기에 이것이 바로 주체화 과정을 중립화하고 객관화하여 다루는 유물론 철학의 일환으로서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이 갖는 장점이다.

 

  그러나 버틀러는 호명 이론으로부터 다른 가능성을, 알튀세르가 생각하지 않은 형태의 주체화 이론을 발전시킨다. 그는 알튀세르가 잠시 언급하고 지나갔던 ‘죄책감’의 역할에 주목한다. 주체의 죄책감이 호명을 받아들이게 하는 원인이다. 바로 여기에 주체의 몫이 있다. 주체는 법과 처벌을 욕망하기 때문에 기꺼이 그 호명을 수용하는데 이러한 역설적인 자발성의 형태를 지닌 주체의 개입으로 인해 주체화 과정은 자동적 포획 과정과 구별된다. 알튀세르가 자신의 아내 엘렌을 죽인 뒤 길거리로 뛰쳐 나가 “내가 엘렌을 죽였다!”라고 소리친 장면은 주체가 내적 충동에 따라 자발적으로 법을 욕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 알튀세르의 전기적 요소를 통해 호명 이론을 증상적으로 독해하려는 버틀러의 이러한 시도에 대해 마슈레는 다시 한 번 개입한다. 알튀세르는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를 집필하면서 리쾨르가 말하는 서사적 주체가 된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아내 엘렌을 죽인 살인자로서 주체-알튀세르의 모습을 자서전 안에서 스스로 그려냄으로써 그러한 글을 쓰는 저자-알튀세르와 살인자-알튀세르를 동일시하는 데 이르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런 식으로 자기-서사를 통해 확립되는 주체가 호명 이론에서 그려내는 ‘주체’와 동일한 주체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버틀러-리쾨르식 주체화 과정은 호명 이론의 주체화 과정과 상당히 다른 것이다.

 

  버틀러는 이러한 “법에 대한 욕망”으로 말미암은 자발적 애착으로서 죄책감에 관해 니체와 (주로 라캉적인) 정신분석을 경유하여 치밀한 분석을 전개한다. 마슈레는 『권력의 정신분석』의 4장 이전에서 전개되는 이 분석의 본질적 요소를 다음의 두 가지로 추려낸다. 첫째, 상징적 질서로서 법이 설치되기 위해서는 주체 측면에서의 호응이 필요한데 주체는 법의 호명을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으로서, 다시 말해서, 주체 자신의 심원한 곳으로부터 오는 복종해야할 필요―왜냐하면 주체는 존재하기를 원하고 이는 곧 상징적 질서 하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에 따라 법의 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첫 번째 점과 긴밀한 관련 속에서, 주체는 존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상징적 질서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기 자신의 일부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게 된다. 즉, 일종의 자기-제한과 자기-부정을 통한 자발적 복종으로 인해 주체는 비로소 주체가 된다.

  

  이렇게 “양심의 논리가 알튀세르의 텍스트를 철저하게 규정하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버틀러에 의해 해석된 호명 이론은 양심 이론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비록 알튀세르가 자신의 텍스트 안에서 이 문제에 관해 주제적으로 다루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무튼 버틀러의 해석이 알튀세르가 생각하지 않은 것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더 나아가 버틀러는 이런 식으로 주체화 과정에서 주체 편에서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이데올로기 혹은 권위의 호명이 우리의 생각만큼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호명 이론을 양심 이론으로 비틀어 읽음으로써 버틀러는 (그가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이 지녔다고 비판한) 신학적 환상에 근거한 자동주의 이론적 틀에서 빠져 나간다. 권력의 기능에는 언제나 여백이 있으며 그것은 주체를 포획하는 과정에서 전도될 위험을 안고 있다. “규칙들을 작동하도록 하는 행위 속에 규칙들을 무너뜨릴 힘이 있다”는 푸코의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