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기록

Jacqueline Lagrée (2002), Spinoza et la norme du bien 정리

RenaCartesius 2024. 1. 4. 02:09

논문이라기보다는 학회 발표문이긴 하지만 논리전개가 그다지 촘촘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들어가며

스피노자 철학에 따라 만약 선이 상대적 가치라면 실천의 규범 역시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면 과연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가치를 판단하는 한 개인의 주관보다 더 상위의 규범을 세우는 것이 가능할까? 또 가능하다면 과연 어떤 규범을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 예컨대 한 개인이 공동체를 위해 어느 정도 희생해야 한다고 할 때 스피노자 체계에서는 이 희생을 어떻게 모순 없이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만약 가치의 상대성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많은 윤리적 요구들을 정당성을 주장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워지게 된다.

저자가 보기에 적어도, 스피노자 체계 내에서, 종교적 규범과 관련한 문제는 더 해결하기 쉬운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 규범들이 서로 대립할 경우 우리는 그것을 특정한 정치적•사법적 맥락과 연관된 윤리적 규범들의 용어로 재해석함으로써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종교적 규범은 도덕적 규범으로 환원된다. 하지만 그렇다면 과연 문제는 이 도덕적 규범은 스피노자 체계 내에서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효용론적 성격이 강한 스피노자 철학에서 과연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규범을 수립하는 것이 가능할까?

규범의 요구

규범은 “존재에 부과되는 요구(exigence portée sur une existence)”라는 캉길렘의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과연 우리에게 규범이 어떤 의미에서 필요한 것인지 혹은 필요하기는 한 것인지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규범이 단순히 어떤 것의 기능을 평가하는 척도라면 우리는 규범에 복종할 필요는 없을 것이며 단지 우리의 필요에 따라 어떤 행동이 문제의 규범에 적합한지 아닌지 맞춰보는 데 규범을 사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규범이 어떤 가치의 실례를 보여주는 전형과 같은 것이라면 규범은 자신이 예화하는 그 가치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스피노자 체계에서는 왜 규범이 필요한가? 우리의 코나투스가 환경 속에서 접촉하는 모든 사물들과의 관계에 알맞게 설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역량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사물들 간의 관계를 우리의 코나투스에 알맞게 조율하는 규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자와의 복합적인 관계로부터 구성되는 매우 복잡한 개체이고 자신의 개체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여타의 다른 존재들과 마주치면서 생겨나는 복잡다단한 반응들을 조율하는 것, 다시 말해서, 타자에게 적응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자신과 타자와의 관계를 규제하는 규범을 정립해야 한다. 어디까지 각각의 존재는 어디까지 타자를 수용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자신을 긍정해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금지되거나 지켜야 하고 어디까지가 허용되는 것인지 등등의 영역을 제한하는 것을 통해 구성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단순히 현재 주어진 삶의 조건들을 넘어서, “함께 잘 살기 위한” 조건들을 갖추기 위해 규범을 필요로 하고 규범을 정립하는 존재이다.

규범과 삶의 체제(régime)

플라톤이 지적한 것처럼 레슬링 선수와 철학자의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똑같은 규칙을 따를 필요는 없다. 각자에게는 각자에게 알맞은 건강의 규칙이 따로 있다. 이는 매우 시사적이다. 규범의 문제는 일반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사이의 영역에 위치한다. 모든 사람에게 일괄적으로 좋은 규범이라는 것은 없으며 한 사람에게만 좋은 것이 규범일 수도 없다. 스피노자는 이 점을 긍정한다. 그에게는 어떤 정언명령 같은 것이 없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의무의 철학이 아니라 좋은 삶을 위해 요구되는 것들을 다루는 철학이다.

규범과 가치

스피노자의 옹호자이든 적대자이든 모두 강조하는 측면은 바로 그의 자연주의가 함축하고 있는 윤리 상대주의이다. 절대적으로 좋은 것은 없으며 인간 혹은 더 구체적으로는 각각의 개인과 관련해서 그에게 좋은 것만이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각각의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상황에 따른 규범이 있다는 것을 긍정해야 하는 것으로 보이고 이렇게 된다면 어제 참이었던 것도 내일은 거짓이 될 지도 모른다.

이 문제를 앞두고 우선 저자는 스피노자의 텍스트에서 전통적으로 인정되는 각각의 가치마다 대응하는 규범 및 기준, 그리고 행동 규칙들이 무엇인지 정리한다. 예컨대 스피노자에게서 진리의 규범은 정합성(cohérence)이며 그것의 규칙은 연역성(déductivité)이다. 즉, 정합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 곧 참된 것이며 그 정합성은 체계의 연역적 질서에 의존하며 우리는 이를 수학 모델에 비추어 평가해볼 수 있다. 아름다움의 규범은 쾌락이고 그것의 규칙은 다양성이다. 즉, 쾌락을 주는 것이 아름다우며 그것이 단순하지 않고 다양한 요소를 포괄하고 있을 수록 쾌락을 준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스피노자에게서 각 가치의 규범을 다음의 표로 정리해볼 수 있다.

 
VALEUR
NORME, CRITÈRE
MODÈLE
RÈGLE D’ACTION
1
Vrai
conception pure
mathématique
déductive
2
vérité du sens
Ecriture seule
TTP 8-10
accord de la doctrine
3
Bien de l’âme
salut, utile
sage
règle d’or : réciprocité
4
Bien du corps
santé
 
diététique
5
Bien de l’État
Paix & prospérité
Etat hébreu
Obéissance à Dieu
6
Beau
plaisir
musique
variété
7
Sacré
piété
prophète
favoriser l’obéissance à la justice et charité
8
Juste
équité
 
rendre à chacun le sien
9
ordre
facilité à retrouver
 
ranger selon un principe
10
légalité
obéissance
 
commandement (masculin et pas féminin)

이러한 규범들의 존재론적 토대는 각 개인들의 자연적 권리를 정초하는 신적 역량(puissance divine)이다. 그리고 지향하는 실천적 목표의 규정성과 그것이 추구되는 맥락에 따라 각각의 개인 혹은 개인들의 집단은 규범들과 삶의 규칙들을 정립한다. 그런데 이때 목적론적 편견은 가치들이 실제로는 지향되는 목표와 관련해서만 가치를 가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오도하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윤리학』 1부에서 비판하고 있다.

아무튼 이제 남은 문제는 실천에 내재적인 것으로서 정립된 윤리적 규범들이 모두 동일하게 다뤄질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째서 진리의 규범은 실천의 규범과 달리 상대적인 것으로 정립되지 않았는지 검토하는 것이다.

규범과 적용(accomodation)의 원칙

『신학정치론』에서 나타나는 스피노자의 성서 해석의 원칙, 즉 규범은 스피노자 체계에서 규범들의 필연성과 상대성을 동시에 생각해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스피노자는 Louis Meyer와 달리 성서의 의미와 진리 사이의 동일성을 상정하지 않는다. 성서의 문구들이 반드시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다. 성서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일관되게 법에 대한 복종과 정의와 자비의 요구를 가르친다는 데 있지 그것이 어떤 자연적 혹은 형이상학적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의 해석 규범은 텍스트의 독해 자체에 내재적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독트린에 입각하여 성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서 자체에 따라 성서의 의미를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 규범은 이론적 관용을 거부하는 동시에 실천적 관용을 정초한다. 즉, 이런 저런 이론을 근거를 성서의 구절로부터 자의적으로 도출하는 것은 금지되지만, 성서가 요청하는 정의와 자비의 실천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해석하는 것은 각자의 양심에 달려 있다. 이처럼 성서 독해는 ‘적용 원칙’에 따르는데 왜냐하면 성서 자체가 대중의 이해력에 맞추어 작성된 것인만큼 우리는 성서의 보편적 가르침을 우리의 특수한 상황에 적용할 때 우리의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성서를 수용하는 해석학적 관대함이 허용된다.

이러한 성서 해석의 사례는 규범이 필수불가결하게 갖춰야 하는 보편성의 특성과 동시에 그것의 적용이 언제나 특수한 경우에 이뤄진다는 특성을 함께 사유하기 위한 모델을 제공해준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이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관계를 사유하는 것이다.

실천적 규범들의 사법적-정치적 규범들로의 환원

스피노자는 종교적 가치들과 규범들을 윤리적 가치들과 규범들로 환원시키고 그 다음 이것들을 다시 사법적-정치적(juridico-politiques) 가치들과 규범들로 환원시킨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자연의 빛으로든 예언의 빛으로든 우리에게 계시된 보편적 종교의 가치는 참된 것이라기보다는 경건한 것이고 이것은 곧 정의와 자비의 실천이며, 또한 그러한 실천은 주권자의 통제 하에서 이뤄진다.

정의는 시민법에 따라(selon le droit civil)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나누어 주라는 요청으로 정의되는 규범이며, 자비는 국가가 허용하는 한에서 자신의 이웃을 도우라는 요청으로―단, 스피노자는 자비가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정의하고 있지 않으며 단지 자비의 사례들을 제시하는 데 만족한다―정의되는 규범이다. 예컨대 자비의 스피노자는 이웃이 요구한다면 자신의 튜닉과 외투를 내어주라는 자비의 사례를 다루는데, 스피노자는 이것을 사법적 맥락에서 다루며 만약 그 이웃이 주권자가 정한 법률을 어긴 자라면 그 이웃을 돕기보다는 재판소에 데려가는 것이 경건하며 또한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그로 인해 그 이웃이 사형을 당하게 될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두 극단의 경우가 성립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 (a) 국가는 법으로 충반한 체제(régime saturé de lois)인 경우, 자비는 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기에 국가 안에서 정의와 자비는 혼동된다 ; (b) 그런데 만약 국가가 해체되어 있는 경우 정의는 법을 초과하는 행위가 되며 법의 여백에서 가능해진다.

(b)의 경우 법적 규범을 초과하는 것으로서 사랑의 가치를 주장하는 요한 신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비록 스피노자가 자비와 관련하여 요한주의적 언술을 인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스피노자는 정의와 자비의 원칙이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은 이 두 가치가 시민법의 사법적 형식을 지닐 때에만 그럴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TTP 19/3)

나가며

저자가 이 발표문에서 다루고자 시도했던 문제들은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

  1. ‘절대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고유한 의미에서 실천적 규범에 관한 사유라고 할 만한 것이 스피노자에게 있는가? 다시 말해서 진리의 규범처럼 절대적인 규범이 실천적 영역에서도 유효한 것으로 나타나는가? 적어도 스피노자의 norma 용법에 관한 연구는 그가 이 단어를 거의 진리와 관련해서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저자는 절대적인 규범은 스피노자에게 오직 진리 규범에만 적용되고 다만 실천적 규범들과 관련해서는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2. 만약 종교적 규범들이 윤리적 규범들로 환원되고 그것이 또 다시 사법적 규범들로 환원된다면 만약 국가가 취약하거나 파괴된 상황에서 실천적 규범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규범들은 자연 상태에서도 의미를 갖는가? 그렇지 않다. 그 경우는 각 개체의 자기 보존의 수준에서만 규범성이 있을 수 있다.
  3. 규범에 대한 사법적-정치적 사유는 때때로 굉장히 보수적으로 보인다. 특히 스피노자가 가능한 모든 정치 체제가 이미 시도되었으며 남성의 여성 지배를 자연적인 것으로 정당화할 때 그러하다.
  4. 만약 (아가페의 의미에서) 자비가 정의에 대한 요청으로 환원된다면, 과연 이러한 구도에서 어떻게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맥락과 관련된 유용한 실천 규범을 넘어서는 어떤 다른 규범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예컨대 이타주의적 자기희생은 고려될 만한 것인가 아니면 전적으로 부조리한 것인가? 스피노자의 체계에서 이는 당연히 부조리하고 고려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국가가 해체된 자연상태의 경우 일차적으로 주어지는) 코나투스의 원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가 성립되어 있고 특정한 맥락에서 적법한 절차에 따라 신민의 목숨을 거는 일, 예컨대 전쟁 투입은 부조리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문답에 의거하여 저자는 스피노자 체계에서 절대적 규범의 정초보다는 윤리적 요청의 보편화가능성을 정초할 수 있는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보편화가능성은 전적으로 이성에 따라 행위하는, 자기 자신을 위해 욕망하는 것을 타인들을 위해서도 욕망하며(황금률), 신에 대한 더욱 크고 정확한 인식을 가질 수록 더더욱 완벽한 인간의 이상적 유형에 입각하여 사유해볼 수 있는 보편 윤리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보편화가능성에서 우리는 공동체, “우리”를 재발견한다. 완벽한 인간을 모델로 하는 윤리는 공동체 윤리를 구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완벽한 인간의 모델이 이성을 따른다는 점에서 진리의 규범에 입각하고 있으며, 황금률을 따른 다는 점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에서 선의 규범은 자기 자신과의 완벽한 합치인 동시에 자연 전체와 타인과 합치하는 적합한 행동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것이 그러한 규범에 따른 행위인지 인식할 수 있는 표지는 바로 기쁨의 감정,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느낌이며, 이것은 신의 관대함과 전적으로 부합하는 한에서 자신의 역량에 대한 내재적 긍정을 규칙으로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피노자에게 상대적 선이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라면 스피노자적으로 이해된 절대적 선은 (최고선이 신에 대한 이해라는 의미에서) 이해하려는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