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기록

Pierre Macherey, « Comment la philosophie est devenue “française” », ¶¶. 1-24 프로토콜 및 발제문 통합본

RenaCartesius 2024. 1. 9. 08:04

“프랑스 철학”이라는 표현은 괄호 치지 않고 사용하기에는 상당히 난처한 것이다. 우리는 마치 프랑스 음식, 이탈리아 음식 등을 말하는 것처럼 “프랑스 철학”에 관해 말하지만 음식이 철학이 아닌 것 이상으로 철학은 음식이 아니다. 미식 문화에서는 다양한 풍미를 지닌 식재료들의 산지를 알아맞추는 것이 뛰어난 미각과 교양을 보여주는 것인 반면에 철학의 경우, 최소한의 요소를 제외한다면, 한 철학이 일차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국적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사례는 이 점에서 시사적이다. 그는 유소년기 이후에는 프랑스에 아주 드물게 그것도 아주 잠시 체류했을 뿐이며 주로 네덜란드에 머물렀고 스웨덴에서 죽었다. 그가 제시한 코기토 원리와 충돌 법칙은 스톡홀름에서나 파리에서나 어디든지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이성의 원리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데카르트는 “프랑스의” 철학자라고 하기도 어렵고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라의” 철학자라고 하기도 어려운데 왜냐하면 그의 철학이 국적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 혹은 철학자에게 국적을 부여하는 식으로 철학의 진영들을 나누는 방식 ―오늘날에는 (민족주의와 큰 관련이 없다는 점에서는 다르지만) “대륙 철학”과 “비-대륙 철학” 사이의 분할이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 대상 자체에 관해서 말해주는 것이 전혀 없다(¶. 1). 

 

하지만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프랑스 철학”이라는 것이 있을까? “프랑스 철학”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의 철학이 형성되고 사용되는 생산 조건의 역사에 관해 알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역사적 부침에 관해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단순히 “프랑스 철학”이라고 하는 대상이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다고 믿는다면 이 규정은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리라. 하지만 “프랑스적”이라는 규정을 어떤 철학의 본래적 성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 철학이 그것의 물질적 토대의 변동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획득하게 된 독특한 맵시(tournure) 때문에 “프랑스적”이게 되었다고 고려한다면 “프랑스 철학”이라는 표현은 일정 부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프랑스적”이라는 표식을 어떤 철학이 내재하고 있는 선천적 특성이 아니라 그것이 특정 상황에서 조건지어지는 끝없는 과정 속에서 어떤 철학에 사후적으로 부여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2). 

 

“프랑스 철학”이라는 표현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과연 철학이 “프랑스적”이게 된 시기는 과연 언제인가? 이 시기는 바로 혁명 이후 19세기로서 이 무렵에 철학은 국민국가의 형성과 맞물려 어떤 것은 “독일 철학”이 다른 어떤 것은 “프랑스 철학”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프랑스와 관련해서 이러한 철학의 변형은 무엇보다 철학적 담론의 정치화의 형태를 취했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적-사회적 현실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담론의 내용 자체가 이론적인 차원에서나 실천적인 차원에서나 정치적 논조(teneur)와 사회적 가치를 지니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그 당시 집단적 삶의 새로운 조직 형태로서 공화정이 어렵사리 형성되고 있던 영역 안에서 특정한 입장을 취한다는 것과 같았다. 철학자들은 이 영역 안에서 공화정의 조직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한편 그 방향성을 두고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철학을 하는지가 어떤 정치적 프로그램을 지지하는지 알려줄 정도로 그들이 발명해낸 사상은 단순히 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실천이었다 (¶. 3). 

 

다른 영역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범주의 사회적 활동으로서 철학의 전문직업화가 일어난 시기 역시 바로 혁명 이후의 19세기였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말하자면 공식적 인증 마크 없이도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었다. 누군가 철학자라고 불린다면 그것은 그의 사상 자체 때문에 혹은 그가 받은 교육 때문에  그가 속한 초국가적인 지식인들의 단체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철학자들은 고대 철학자들의 « 학파 »나 중세의 수도원, 종교의 관할 하에 있는 여러 학교 등에서 교육받고 활동했지 어떤 국가 조직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근대 시기에 일어난 철학의 전문직업화에 따라 한 명의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점차 그가 공적 삶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는 잠재적 교육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과거에 철학자가 주로 제한된 영역(지식인 서클 등) 안에서 지식을 공유하는 데 머물렀다면, 새로운 사회적 지평과 함께 국가가 교육 활동을 사실상 전담하게 됨으로써, 이제 철학자는 기존의 좁은 영역에서 벗어나 더 많은 수의 대중을 대상으로 삼으며, 공화국의 시민을 길러내는 역할을 맡은 일종의 공무원이 되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철학자는 특정한 제도적 프로그램에 입각하여 논문 작성과 주석, 발표 등의 수행 방식을 통해 학생들을 길러내는 교수가 된 것이다. 이러한 철학자의 지위 변동은 철학자의 사변적 활동의 형식과 무관할 수 없다(¶. 4).

 

철학 활동이 공적 교육제도로 삽입되면서 일어난 주된 결과 가운데 하나는 바로 철학적 담론의 수사법과 관련한다. 만약 명석성을 추구하는 프랑스 철학 혹은 글쓰기 정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프랑스의 영속적 본질 따위에서 자연스럽게 유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시기에 우연한 역사적 부침의 과정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적 담론에 대한 수사법은 사실 철학적 성찰의 과정을 철학이 아닌 다른 영역으로 옮겨두는 것이 아닐까? 철학은,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합리적 사유의 역학을 그 내용을 훼손하지 않은 채 전개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수사학 규칙과는 독립되는 철학적 사변을 이끌어 가는 독자적인 규범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누구보다 철학자들 자신이 이러한 규범의 필요성을 감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데카르트와  아우렐리우스는 그들이 어떤 언어로 철학을 하는지에 따라 상당히 다른 활동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언어로 철학의 관념들을 실어 나르는 것이 적합할까? 아마 스피노자가 기하학적 증명 방식을 택한 것은 그가 보기에 이 표현 방식이, 일상언어가 일으킬 수 있는 오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며, 철학적 논증의 체계를 내적으로 전개하고 또한 외적으로 전달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스피노자 본인의 생각과 달리 그가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채택한 영사막은 그다지 투명하지도 그의 철학의 내용에 관한 해석적 논란을 종식시켜주지도 못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철학이 그것이 전개되는 물질적 토대로부터 추상될 수 없다는 것은 철학이 그것이 전개되는 제도적 환경으로부터 단절될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철학이 표현되는 수사학적 차원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 역시 의미한다. 철학적 글쓰기의 스타일은 단순히 어떤 기교가 아니라 철학이 전개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며 그 담론의 물질적 토대의 일부를 이룬다(¶. 5). 

 

물론 철학은 언어로서 말해질 뿐만 아니라 언어를 통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지난 2 세기부터 시작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언제나 철학은 그 활동이 이뤄지고 또 그 사변의 결과가 유통되는 환경 내에서 사용되는 언어와의 타협 속에서 수행되었다. 요컨대 철학자들의 언어는 그들만을 위해 고안된 인공 언어가 아니었다. 철학이 일상 언어와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는 이러한 조건으로부터 철학은 특정 언어적 환경과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되고 그로 인한 독특한 뉘앙스를 지니게 된다. 이로부터 철학의 내용이 보편적인 것을 다루고 있음에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그것을 번역하기가 매우 까다로워지는 번역의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 6) 

 

그러나 적어도 2세기 전 프랑스에서 철학과 일상 언어 사이의 결합은 조금 더 독특한 맥락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시기 철학의 언어가 단지 (그 기원이 약 9세기 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프랑스어일 뿐만 아니라 “공화국(État républicain)”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이제 철학은 학교를 포함하여 모든 공식 기관에서 사용되는 “프랑스 민족”의 언어를 통해 가르쳐지기 시작했다. (¶. 7)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에서는 문학(littérature)과 철학 사이의 결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화국의 교육 시스템에서 철학은 “문과(littéraire)” 학문으로 분류되었다. 고대 철학자 혹은 당장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 등 많은 철학자들의 이름이 철학사 뿐만 아니라 과학사를 장식하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철학과 과학의 이러한 관계가 변화하게 되었다. 과학적 교양이 거의 없는 빅토르 쿠장은 더 말할 것도 없으며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나온 콩트나 르누비에 등 역시 그들의 과학적 지식 때문에 철학자로 분류된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쥘 라슐리에(J. Lachelier)의 문과(des Lettres)와 이과(des Sciences) 사이의 구별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는 두 영역의 구분이 인간의 주관성과 자연의 객관성 사이의 대립에 기초한다고 보는데 철학은 사물의 본질과 정신 그리고 자유를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주체의 학문이고 만약 그것이 대상에 관심을 갖는다면 주체에게 떠오르는 것으로서의 대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철학 교육을 위해서는 문과적 소양을 길러야 하고 따라서 교육 시스템 상에서 문과 학문으로서 분류되어야 한다. (¶. 8).

 

이와 같은 라슐리에의 구별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이에 관한 그의 논증이 문과 학문과 이과 학문이 구별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시작하여 철학은 마땅히 문과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데 있다. 학문을 주관성과 객관성의 척도로 즉 그것의 탐구 논리가 필연성의 질서를 고려하는지 아니면 (인간 정신의) 자유의 질서를 고려하는지에 따라 분류해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적 차원의 진술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라슐리에는 철학이 가치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닐 수 없다는 식의 관점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문과로 분류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순환 논증을 펼치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논증은 실천적 의도에서 정당화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그가 철학을 문과 학문으로 분류함으로써 프랑스의 철학 교육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데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르켐이 그 공허함을 지적한 바 있는, 사실과 가치의 구별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에 따라 철학을 생각하는 관점은 결국 철학이, 문과 학문으로 분류되었다는 그 원죄로 인해, 실제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웅변술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닐까? (¶. 9) 

 

물론 문과와 이과의 분기(bifurcation)가 단숨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실제 이러한 이분법적 도식이 정착되기까지는 복잡한 역사적 과정이 있었다. 우선 나폴레옹 1세가 설립한 교육 기관으로서 대학은 우선 읽고 쓰는 능력을 길러 공무원들을 양성하는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산업 혁명의 여파로 인한 교육적 수요 및 생-시몽주의자들의 참여 등으로 인해 점차 공립 교육 시스템은 단순히 서류처리만 하는 공무원만이 아니라 변호사, 엔지니어, 재정 전문가 등 여러 층위의 전문 지식인을 육성하는 기관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고전적 인문학 교육 이후에, 부수적인 선택교양 과목 수준으로 가르쳐졌던 이공계 학문이 점차 자율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분과 학문으로서 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철학은 이전의 지배적 위치를 상실했다. 과거 학문들의 분기가 뚜렷하지 않았던 시기에 철학 교수는 대학 전반의 교육 프로그램을 관장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열어젖힌 새로운 사회적 배경 속에서 철학은 분과학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지위 변동 속에서 철학이 그나마 지배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모든 학문을 관통하는 ‘논리학’으로서 가치를 강조해야 했다. 이를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철학은 더 이상 존재론의 영역을 과감히 버린 채 공리를 다루는 학문으로 축소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로부터 두 가지의 효과가 나타났다. 첫째로 철학은 (철학의 아성을 위협하는) 분과 학문과의 관계를 단절하게 되었는데 그리하여 철학은 문학화되기 시작했고 일종의 수사학적 형식주의로 전락했다. 둘째로 철학이 문과 학문으로서 점차 문학과 가까워지면서 (형식적으로는 유지되고 있긴 하지만) 철학 자신의 종별성(spécificité)을 잃어버렸다. 19세기와 20세기 프랑스에서 철학 교육의 특성을 결정 짓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던 이 두 가지 효과를 주의깊게 검토해보아야 한다. (¶. 10)

 

먼저, 분과 학문과의 단절은 어떤 의미에서 과학들(sciences)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콩트의 역설적 표현을 빌려온다면 새로운 시대의 철학자는 “과학적 일반성들의 전문가(spécialiste des généralités scientiques)”가 되었다. 먼저 복수형으로 사용된 “과학적 일반성”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일성을 갖춘 하나의 대문자 ‘과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종류의 현상들을 저마다의 방법론으로 다루는 다양한 “과학들”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각 과학 영역에서 발전한 일반성들을 다루는 특수한 철학들―수학적 철학, 천문학적 철학, 물리학적 철학 등―만이 있다. 각 학문 영역의 고유성을 무시한 채 그것들을 추상하여 하나의 동일한 지평 위에서 다루는 일은 부적절하다. 콩트가 개시한 이러한 과학의 복수성에 관한 생각은 이후 바슐라르, 캉길렘으로 이어지는 국지적 인식론들(épistémologies régionales)의 생각으로 발전된다. 더 나아가 철학과 과학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콩트의 두 번째 기여는 바로 과학이 철학을 통해 정당화된 형이상학적 토대에 근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무너뜨린 것이다. 과학의 발전사는 철학적으로 그 진리성이 정당화된 지식들을 축적해온 과정이 아니라 각각의 과학이 맞닥뜨린 오류를 합리화하는 과정이다. 오류의 구성적 역할에 대한 이러한 관점 전환은 철학에도 영향을 미쳐서 철학은 진리의 개념에 관해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는 과제를 갖도록 만들었다. (¶. 11)

 

과학이 (철학적으로 정당화된 것으로서) 미리 주어진 기준들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동시에 현재까지 있었던 과학만이 과학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왔다. 즉, 새로운 과학이 얼마든지 더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콩트가 보기에 이 새로운 과학은 바로 사회학이었다. 기존의 다섯 가지 학문(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과 동일한 과학의 자격으로서 추가된 사회학은 인간적 현상, 조직화와 인간의 집단적 삶과 관련한 현상을 탐구한다. 그리고 “실증적 철학(philosophie positif)”으로서 등장한 사회학은 지금은 그 수효가 너무 많아져 버린 최초의 “인문 과학(sciences humaines)” 가운데 하나였다. 이 사회학은, 19세기 프랑스 지성계의 화두였던 “내적 인간(homme intérieur)”과 “외적 인간(homme extérieur)” 관련하여, 사회적 현상을 개인적 주관성의 차원으로 환원시켜 이해한다는 점에서 내적 인간을 다루는 심리학(psychologie)과 라이벌 구도를 지니며 “외적 인간”을 과학적으로 탐구한다. 콩트는 이러한 사회학의 지배적 위치의 확립을 위해 심리학을 철저하게 공격했으며, 반대로 쿠장과 주프로아(Juffroy) 등의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영감 하에서 전개된 내성 철학의 입장에서는 사회학으로부터 주권적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공동체주의적 특성을 지닌, “사회주의”의 위협을 보았기 때문에 이 새로운 학문을 철저하게 공격했다. 그러나 아무튼 (심리학이든 사회학이든) 이러한 새로운 학문들은 비록 철학의 한 부분에서 시작했을 지라도 그 학문성을 인정받기 위해 더 이상 철학의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새로운 학문들, 즉 인문 과학들은 여전히 “경성” 과학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인문학 및 인문 과학부(facultés des lettres et des sciences humaines)”이라는 학과명이 시사하듯이 (광의의) 문과 학문으로서 분류되며, 비록 “과학”의 가면을 쓰고 있으나 여전히 그 과학성의 지위를 의심받고 있다. (¶. 12)

 

그런데 인문 과학의 이러한 애매한 지위는 철학의 입장에서 매우 불편한 것이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철학은 칸트가 이성의 세 번째 이율배반에서 정의한 관점에 따라, 자연의 필연적 인과 법칙을 뛰어넘는, 정신의 자유의 영역이자 동사에 의무의 영역을 탐구하는 인본주의적이고 인간학적인 소명을 위해 “인문 과학들”을 낳았다. 그런데 이 인문 과학이 너무 과학적인 것이라면 오히려 그 소명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개별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인간의 행동이 과학적으로 설명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자유로부터 나온 가치 있는 창조적 활동이 아니라 단순히 법칙에 따른 사실에 불과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철학은 정신의 자율성을 옹호하고 자신의 “문과적” 성격을 지키기 위해 인문 과학과 거리를 두었다. 예컨대 라슐리에는 “의식”에 관한 탐구를 심리학적 연구를 통해서 접근 가능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것으로서 형이상학적이고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규범적인 학문으로 규정하고자 시도한다. 요컨대 라슐리에가 보는 철학의 임무는 실증적 자료들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자유를 다루는 것이다. (¶¶. 13-14)

 

이러한 라슐리에의 신칸트주의적 소명은 어쩌면 이후 (라슐리에 본인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데리다가 합류할 노선을 개척한 것일지도 모른다. 데리다는 『철학의 여백(Marges de la philosophie)와 「백색 신화학(La mythologie de la philosophie)」에서 매우 도발적인 테제를 제시한다. 그 테제에 따르면 철학적 글쓰기란 특정한 메타포의 형식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일종의 시(poésie)이다. 결국 철학은 문학적 장르(genre littéraire)인 셈이다. 데리다의 논변은 다음과 같다. 과학적 인식은 그 진리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을 다룬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담론들은 권력에 봉사한다. 마지막으로 문학은 그 형식을 자유롭게 변주한다. 그런데 철학은 조금 특수한데 왜냐하면 과학과 문학의 특성을 공유하면서도 그것의 무관심성이 철학을 이데올로기적 담론과 구별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이 지닌 정신적 작업의 특색과 언어적 생산은 시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세 종류의 담론 유형과 구별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결국은 문학에 제일 가까워지게 된다. 철학이란 결국 말을 가지고 노는 하나의 시가 아닌가? (¶¶. 15-16)

 

『근대성의 철학적 담론』의 데리다에게 헌정된 부록, 「철학과 문학 사이의 유적 차이의 평준화에 관한 소론」에서 하버마스는, 이러한 철학과 문학의 언어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평준화 작업이, 기존의 위계(말하기와 글쓰기, 지성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 자연과 문화, 내부와 외부, 정신과 물질, 남성과 여성)를 전복하는 것을 목표로 함으로써, 어떻게 형이상학적 담론을 해체했는지 설명한다. 실제로 데리다가 미국 대학의 문학부에서 강연을 한 것은 프랑스의 철학 교육자들에게 분과학문으로서 철학에 대한 심각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데리다의 관점과 실제 행보가 철학의 헤게모니를 해칠 뿐만 아니라 철학이 문학과 구별되는 것으로 갖는 종별성까지 없애버리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 17)

 

물론 19세기 공화국의 철학자들이 철학을 문과 학문으로 분류하면서 데리다 같은 사상가가 나타나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1965년에 발표된 논문 「철학적 교육」에서 디나 드레이퓨스(Dina Dereyfus)와 플로랑스 코도스(Florence Khodoss)는 철학과 문학 사이의 가능한 한 확고한 경계선을 긋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에 따르면 철학의 비-과학성(non-science) 때문에, 실제로는 과학도 문학도 아닌, 철학을 문학의 편에 더 놓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과학에 점차 긍정적 가치가 부여된 순간과 관련되어 있다. 과학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과학 외의 다른 분야, 예컨대 문학과 철학은 그로부터 배제되어 주변부에 자리하게 된다. 요컨대 과학중심주의로 인해 비-과학으로 분류되는 것들이 서로 짝지어지는 효과가 생겨난다. 그러나 비록 비-과학성이라는 특성을 철학과 문학이 공유할 지라도 여전히 두 학문은 절대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두 저자가 보았을 때 문학은 “개념화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로부터 플라톤적인 철학과 문학의 구별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물론 문학이 ‘거짓’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학은 허구(illusion)을 믿는 것으로 성립한다. 바로 이 점이 문학 텍스트를 읽는 독자와 철학 텍스트를 읽는 독자를 구별시켜 준다. 라슐리에가 존재(être)를 다루는 학문과 당위(devoir-être)를 다루는 학문을 나누고 철학을 후자에 위치시킨 것처럼 이 저자들은 철학은 진리를 다루고 문학은 허구와 오류를 다룬다는 식으로 나눔으로써 양자를 구별하려고 한 것이다. (¶¶. 18-20)

 

진리를 가르치는 것과 당위를 가르치는 것. 이것은 철학에 부여된 신성한 임무이다. 그런데 과연 철학은 어떻게 진리와 당위를 가르칠 수 있을까? 즉, 철학 자체는 어떻게 가르쳐질 수 있는가? 철학의 “내용”은 일정한 방식으로 제도화된 프로그램에 따라 통해 습득될 수 있는 것일까? 혁명 이후 프랑스라는 독특한 조건 속에서 철학 교육가능성 문제는 상당히 역설적인 상황에 처해있었다. 철학은 당연히 교육될 수 있는 것으로 또한 교육해야 하는 것으로 국가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는 비판 정신을 기르는 것으로서 철학의 당위와 상충하는 것이 아닐까? 분명 공화정의 이념은 일반 이익을 고려하여 공동체를 합리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운영하는 국가 철학자의 표상을 길러냈다. 그러나 이 표상은 대개는 순전한 허구에 불과하다. 어쩌면 국가 주도 하에 철학하는 것을 교육하는 것은 어쩌면 특정한 사상을 주입하는 세뇌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은 설령 공화국의 좋은 시민을 길러내기 위해 국가 시스템 내에서 철학을 교육하는 일이 필수불가결하다고 하더라도 만약 어떤 정부가 그 가치에 반하는 교육을 시행하라고 명령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특별히 강인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적은 급료를 받는 공무원인 철학자가 이를 전적으로 거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 21)

 

훌륭한 교육자였던 드레이퓨스와 코도소는 이 어려움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철학과 철학적 교육이 맺는 관계를 하나씩 열거하면서 철학의 교육 가능성을 옹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1. 철학을 배울 수 있는 것은 철학적 텍스트 속에서이다. 따라서 오직 철학 텍스트 속에서만 철학하는 것의 모델이 있다. 그러므로 철학을 가르치는 것은 철학적 텍스트 속에 있는 철학하는 것의 모델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2. 철학을 가르치는 것은 그 모델들을 지식, 문화, 실존과 경험의 현재적 형식들에 적용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3. 그러므로 철학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한편으로는 아직 검토되지 않은 채로 “주어진 것들”을 수집하고 검사하고 질문에 부치고 비판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경험의 양상들을 총체화하는 방법론과 개념화 방식을 가르치는 것이다. 
  4. 그러므로 철학적 교육은 일반적인 교육의 요구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와 두 번째 점을 고려해보자.  이 두 가지는 “철학을 가르치는 것(enseigner la philosophie)”과 관련한다. 한편 세 번째 점은 “철학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enseigner à philosophie)”과 관련한다. 이것은 철학 교사가 철학 과목이라는 하나의 수업에서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 교사는 철학을 가르치는 것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학생들이 철학하는 것까지 배워나갈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물론 이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고 철학 교육자들의 시도는 종종 매우 우스꽝스러워질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네 번째 점으로 제시된 “철학적 교육은 일반적인 교육의 요구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다”라는 선언에서 부사 “완전히(pleinement)”의 사용은 드레이퓨스와 코도소 역시 교육 시스템에서 철학이 차지하는 비정상적 위치에 대해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과연 철학이 정말로 과학이나 여타의 과목처럼 그 교육 목표를 일련의 프로그램에 따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성격의 내용을 지닌 학문인가? 프랑스 청년들이 성인이 되기 전 마지막 학년에서 배우는 철학 과목은 시민성 함양의 이념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교육의 완성이라는 상징성을 갖는 특권적 학문이라는 점에서 여타의 과목들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물론 철학이 그러한 과목이라는 이념은 거의 대부분 실현되지 않은 채 말 그대로 생각에 머물고 말지만 말이다. (¶¶. 22-23)

 

이 책에 수록된 연구들은 19세기 프랑스 철학 일반을 다룬다기보다 (1789, 1799, 1802, 1815, 1830, 1848, 1850, 1870년) 혁명 이후로 프랑스 공화정의 제도가 점차 어렵사리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던 매우 특수한 역사적 맥락과 관련한 저자와 논점들을 다룬다. 바로 이 맥락 속에서 철학은 “프랑스”의 철학이 되었으며, 그것의 “문학화(littéralisation)”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철학의 지형은 보날과 샤토브리앙 같은 보수주의 진영과 생-시몽과 프루동 같은 혁명적 혹은 개혁적 사회주의 진영의 양극단과 그 중간에 위치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정치적 삶을 합리화하고자 시도했던 콩트와 쿠장의 진영으로 나뉘었으며  철학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 정치적 공간 내에서 특정한 진영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