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기록

Jean-François Kervégan (2010), « La théorie kantienne de la normativité » 정리

RenaCartesius 2023. 11. 24. 04:08

 

서론

이 논문에서 저자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 1) 칸트의 실천철학에서 초기 저작(『도덕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 Fondements de la métaphysique des mœurs(1785)』, 『실천이성비판(1788)』)과 후기 저작(『도덕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itten ; Métaphysique des mœurs(1796-1797)』) 사이의 중대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칸트 철학에서 균일하고 일관적 규범적 이성에 관한 이론을 수립할 수 있는지 탐구하고 ; 2) 칸트에게 그러한 이론이 있다면 그의 실천이성 이론의 체계에서 과연 어떻게 윤리의 영역과 법의 영역이 각자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구별되고 있는지 탐구하는 것이다.

 

규범성에 관하여(De la normativité)

윤리의 영역과 법의 영역의 분리

18세기 말부터, 토마지우스로부터 시작되어, 그리고 독일관념론자들(칸트, 피히테, 헤겔), 또한 벤담의 논의에 힘입어, 자연법 전통(jusnaturalisme)에서 당연시되었던 윤리와 법 사이의 결합이 점차 해체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법실증주의(juspositivisme)로 이어질 수 있는 길목을 터놓는다. 그러나 벤담의 공리주의가 법과 법이 되기를 바라는 것 사이의 혼동을 통해 윤리와 법 사이의 결합을 해체했다면, 반면에 독일관념론 전통은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의 구별 및 그것의 근본적 통일성을 주장하는 테제를 통해 법과 윤리의 영역을 구별했고 이것은 한스 켈젠 등의 법실증주의 전통의 유산으로 직접적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칸트는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을 구별하지만 이러한 구별은 이성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의 순수한 이성의 두 가지 사용법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순수 이성을 이론적 혹은 인식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으며 또는 실천적 혹은 규범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칸트 그리고 피히테는 거의 동일한 시기(1795-1796년)에 실천 이성의 영역을, 다시 한 번, 법적 규범성의 영역과 윤리적 규범성의 영역, 두 가지로 구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칸트의 경우는 법의 학설(doctrine du droit, Reschtslehre)과 덕의 학설(doctrine de la vertu, Tugendlehre)를 구별하며, 피히테는 거의 유사한 방식의 구별을 취하면서 “자연법(droit naturel)”에 관해 다루는 저작(Grundlage des Naturrechts)과 “윤리(éthique)”에 관해 다루는 저작(System der Sittenlehre)을 따로 따로 출판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피히테는 법철학이 도덕을 다루는 저작의 한 챕터가 되어서는 안 되며 그 자체로 고유성을 갖는 자율적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칸트 역시 이미 『실천이성비판』에서부터 “책무(obligations)” 일반의 체계”로서 “도덕형이상학(métaphysique des mœurs)”이라는 큰 틀에 속하는 법에 대한 학설이, 마찬가지로 도덕형이상학의 영역에 속하는, 윤리에 대한 학설에 대해 갖는 특수성을 강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칸트에게서는 법(Rechtslehre)과 윤리(Sittenlehre ou Tugendlehre), 그리고 도덕(die moral)을 구별하는 용어법이 확립된다. 도덕은 법과 윤리를 망라하는 유 개념이고 법과 윤리는 각각 도덕의 유에 속하는 종 개념이다. (반면에 헤겔은 칸트와 대립하는 용어법을 지니고 있다. 헤겔에게서는 인륜성(Sittlichkeit)이 추상적인 두 규범적 체계 추상적 (사)법(das abstrakte Recht)과 도덕성(die Moralität)을 포괄해야 한다)

 

칸트에게서 이성의 규범적 힘

하지만 우선, 규범적 체계의 구별법에 관해 다루기 이전에, 규범성에 관한 칸트주의적 이론의 개요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실천 철학을 재정초하고자 시도하는 칸트주의적 시도는 이성을 규범적 힘을 가진 것으로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이러한 실천 이성의 규범적 능력 혹은 힘(faculté ou pouvoir, Vermögen)은 이론 이성과 구별되는 상이한 이성의 능력이 아니다. 실천 이성은 어떤 이성의 하위 종이 아니라 순수 이성 자체가 실천적이다.

그런데 『실천이성비판』에서 이성의 규범적 힘은 일단 규범들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실천 이성은 “규범들이 있다” 혹은 “규범성이 존재한다”라는 ‘이성의 사실(Faktum der Vernunft)’로부터 구성된다. 그런데 이러한 규범들은 칸트가 “건전한 이성” 혹은 “공통 이성”이라고 부른 것으로부터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며 칸트가 고려하는 실천 이성의 역할 혹은 실천 이성의 규범적 힘은 이런 저런 규범들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제시된 규범들을 검토하여 그것의 타당성을 재인(reconnaître)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실천 이성은 특정한 규범들을 그것이 정언 명령으로서 보편화될 수 있는지 시험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오직 단 한의 정언 명령만이 있다. 그것은 곧. ‘네가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동시에 바라게 되는 오직 그러한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라는 것이다.
(Grundlegung, p. 421 . “순수이성의 근본적 법칙” 정식과 비교해볼 것 : KpV § 7, p.30)

 

요컨대 실천 이성의 고유한 기능은 행동 규범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규범적 언명들의 타당성을 인식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다. 실제로 『도덕형이상학 정초』에서나 『실천이성비판』에서 규범의 생산 혹은 규범의 내용과 관련한 문제는 다뤄지지 않는다. 이 두 저작에서 칸트가 고려하는 문제는 실천 이성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규범들의 타당성을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필연적이고 충분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지 검토하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의 실천 철학에 제기되는 ‘형식주의’라는 비판은 부적절하고 공허한데 왜냐하면 애초에 칸트가 자신의 탐구의 대상을 ‘형식’으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만약 칸트 철학의 이러한 특색을 ‘형식주의’라고 한다면 이러한 의미에서의 형식주의는 전혀 비난받을 만한 것도 아니고 한계를 지닌 것도 아니다. 실천 이성의 기능은 규범적 명제들―주체에게 “나는 x를 하는 것을 나에게 규칙으로 부과한다, 라는 행동규칙의 형식으로 주어진 준칙을 의미한다―을 그것의 타당성을 필증적인 방식으로 정립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보편화 테스트에 적용하는 데 있다. 요컨대 칸트의 형식주의는 어떠한 규범이 지니고 있는 경험적이고 조건적 내용이 아니라 그 규범을 타당한 규범으로서 만들어주는 (경험적 요소와 무관한 순수한) 형식적 구조를 탐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의 실천 철학에서 개개의 규범들을 타당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그것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의지의 자율성”에 관한 칸트의 논변의 혼동하여 칸트의 실천 철학의 의지의 철학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칸트는 “모든 도덕적 법칙들과 그 법칙들에 부합하는 의무들의 유일한 원리”로서 의지의 자율성이 규범들의 원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의지의 자율성은 단지 구속력(caractère obligatoire, obligatoriété, Verbindlichkeit)의 원천이다. 칸트의 실천철학, 다시 말해서, 정언명령과 의지의 자율성에 관한 이론에 따르면, 실천적 법칙(x를 바라야만 한다, il faut vouloir x)을 다른 가언적이고 조건적 계명(x를 얻기 위해서는 y를 하기를 바라야 한다, pour obtenir x, il faut vouloir y)을 구별시켜주는 적법성(légalité)의 보편 형식―아펠과 하버마스가 U 원리라고 부른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이 이런 저런 유형의 대상들과 관련한 인식들을 산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성 일반과 관련한 담론의 진리의 일반 조건을 규정하는 것을 목표로 하듯이 『실천이성비판』 역시 좋은 행동 규범들을 산출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규범들의 구속력의 원리를 제공하는 데 있다. 이 원리가 바로 보편화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의 준칙을 이 보편화 검사에 부칠 때 이 검사는 정확히 준칙의 어느 부분이 ‘도덕 법칙(loi morale)’으로 보편화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것일까? 행위자가 고려하는 목적, 다시 말해서, 행위자의 의도(intention, Absicht)는 결코 아니다. 보편화 검사가 적용되는 부분은 바로 행위자의 “마음씨(disposition d’esprit, Gesinnung)”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행위 준칙에서 보편화 검사를 받는 부분, 규범의 타당성을 부여해줄 있는 부분은 내가 특정한 규범적 행위를 할 때 고려하는 목적이나 그것을 달성하고자 하는 나의 의도가 아니라 그러한 준칙을 나 자신에게 스스로 규범하는 나의 ‘마음씨’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를 “의도의 도덕(morale de l’intention)”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행위 준칙의 도덕성 혹은 비도덕성을 결정하는 것은 이 마음씨의 보편화가능한 “형식적” 성격(caractère « formellement » universalisable)이다. 이처럼 순수 이성의 규범적 힘에 대한 칸트적 비판은 특정한 규범들의 내용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의무론적 명제들의 형식적 혹은 선험적 구조로서 규범성을 문제 삼는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의 목적은 실천 이성의 규범적 힘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능력의 한계를 제한짓는 것이다. 그는 실천 이성에게 규범적 명제들의 타당성을 인정(reconnaître)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논증하지만, 규범들을 생산하는 힘은, 마치 이론 이성이 형이상학적 지식을 산출하는 힘이 없는 것처럼, 가지고 있지 않다.

 

칸트에게서 규범적 명제에 대한 인식(reconnaissance)은 지식(connaissance)인가?

그런데 칸트에게서 이러한 실천 이성의 규범적 힘에 관한 논변은 그의 이론과 전통적 자연법 이론 사이의 관계에 관해 묻도록 한다. 자연법 이론에서 인간의 이성은 자연에 주어진 도덕적 의무들을 파악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칸트에게서는, 이성은 규범적 명제들을 보편화 검사에 부치는 절차적 개념화(conception procédurale)을 통해 그 명제들의 타당성을 인식(reconnaissance)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규범적 명제들의 타당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 어떤 행위 준칙들이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행위자의 주관적 차원을 넘어서 객관적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일종의 이론적인 지식이기도 한가? 절차적 개념화에서 인지적 개념화(conceptition cognitive)로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이 문제―규범적 명제들의 성격이 “초월론적”인 것인지 “실용적(pragmatique)”인 것인지에 관한 이 문제는 아펠과 하버마스 사이의 논쟁을 낳았다―에 관한 칸트의 답변은 사실 매우 명확하다. 실천 철학의 명제 혹은 규칙들은 주관적인 것이기에 규범적 명제들에 “객관성”을 부과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정한 문제는 칸트 스스로가 간혹 ‘실천적 지식(connaissance pratique, prakitische Erkenntnis)’ 같은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므로써, 매우 은밀하게 절차적 개념화에서 인지적 개념화로의 이행을 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의 이 문제는 칸트 철학에서 두 가지 영역, 이론 철학과 실천 철학의 영역의 조화 문제와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칸트는 규범적 명제들, 자유에 법칙을 주는 명제들은 오직 실천 철학에 속한다고 본다. 또한 다른 기술적 혹은 인지적(descriptive ou cognitive) 기능을 지닌 명제들은, 그것이 “기술적-실용적”일지라도 이론 철학의 대상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실천철학의 영역은 자유의 법칙들의 영역으로 엄격히 한정되며 이 형식적 법칙들은 어떠한 목적도 의도도 고려하지 않는다. 이 법칙들의 구속력은 (자연의 필연적 인과법칙과 달리) 오로지 자유 의지로부터 온다.

[~이론 철학과 실천 철학 사이의 매개로서 판단력 비판의 역할~]

이러한 철학의 각 영역의 조화에 대한 검토는 칸트가 어째서 간혹 ‘실천적 지식(connaissance pratique, prakitische Erkenntnis)’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지를 간접적으로 밝혀 준다. 엄밀한 의미에서 지식 또는 인식(Erkenntnis)는 이론적 영역에서만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실천 영역의 대상인 규범들의 타당성에 대한 인식(reconnaissance) 역시 앎 또는 지식의 일종으로 포괄할 수 있다면, 이러한 규범들의 타당성 문제를 다루는 실천 철학이 역시 초월 철학의 기획으로서 특정한 명제들에 (이론 영역에서는 참된 것으로서, 실천 영역에서는 타당한 것으로서) “인식”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해주는 것에 대한 조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규범적 명제의 타당성을 재인한다는 것은 그것에 타당성을 부여해주는 절차적 조건을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넒은 의미의 앎이라고 할 수 있다.

 

적법성과 도덕성(légalité et moralité)

그런데 실천 이성의 규범적 힘에 관한 칸트의 이론은 『실천이성비판』(그리고 『도덕형이상학 정초』)와 『도덕형이상학』에서 다소 다르게 나타난다. 두 저작 사이의 차이는 적법성과 도덕성의 구별 방식에 있다. 1788년 저작, 『실천이성비판』에서 양자 사이의 구별은 “단순한 적법성(simple légalité)”, 결과적으로 ‘법(droit)’을 도덕철학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의무(devoir)의 개념은 행위에서는 객관적으로 법칙과의 합치를 요구하고, 그러나 행위의 준칙에서는 주관적으로 법칙에 의해 의지를 규정하는 유일한 방식인 법칙에 대한 존경을 요구한다. 의무에 부합하게(conformément au devoir) 행위했다는 의식과 의무로부터(par devoir), 다시 말해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행위했다는 의식 사이의 구별은 바로 이 점에 의거한다. 이 가운데 전자(적법성, légalité)는 경향성들이 순전히 의지의 규정 근거들인 때에도 가능하지만, 그러나 후자(도덕성), 즉 도덕적 가치는 오로지, 행위가 의무로부터, 다시 말해 순전히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데에만 두어져야 한다.
(KpV, p. 81)

 

요컨대 이러한 적법성과 도덕성의 구별은 법과 윤리의 영역을 분할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주체가 (사법적인 것이든 윤리적인 것이든) 규범과 관계하는 두 가지 양상을 구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리는 사법적 법과 “도덕적인” 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한편 윤리적 규범과 “적법한(légal)”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천이성비판』의 구별법에 따르면 적법성―이것은 규범에 대한 외재적 존중(respect extérieur)으로서 이 존중은 행위의 주관적 이유를 구성하지 않는다―은 사람들이 법적 규범과 관계하는 일반적 양식(mode normal)을 규정하는데 이때 적법성은 위 주체의 측면은 고려될 필요 없이 단순히 문제의 행위의 법에 부합(conformité)하기만 한다면 성립될 수 있다. 이것은 법에 대한 상대적 평가절하를 가져온다. 이러한 구별법에서 도덕성은 윤리적 영역과 혼동되며 양자는 거의 동일시된다. 왜냐하면 오직 윤리적 영역에서만 규범성의 조건인 규범과의 주관적 관계, 다시 말해서, ‘마음씨(Gesinnung)’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천이성비판』과 『도덕형이상학 정초』에서 (경험적 요소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덕적 인간학(anthropologie morale)”과 구별되는) 순수한 도덕 철학의 영역, 즉 도덕형이상학(métaphysique des mœurs)은 (후기 칸트에서 정립된 용어법을 따른다면) 윤리 혹은 덕과 관련된 학설로 환원될 수 있다. 이처럼 ‘윤리학’의 영역만을 포괄하는 의미의 도덕 철학의 바깥에는 인간 본성(nature)과 관련한 경험적 내용을 다루는, 비-초월론적 철학으로서, 도덕적 인간학만이 있다. 결국 이러한 도식에서 법은 도덕적 혹은 윤리적 규범성과 관련하여 어떠한 개념적 자율성도 지니지 못하며 초기 칸트에서 윤리와 도덕은 동의어로 취급된다.

하지만 『도덕형이상학(1796-97)』에서부터 칸트는 윤리적 규범성과는 다른 구조를 지닌 법적 규범성의 가치와 그 자율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도덕형이상학의 영역에 법과 윤리라는 두 가지의 입법(législations)이 동등한 자격을 갖춘 채로 공존하게 된다. 이때 양자는 규범의 내용이나 대상의 차이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책무(obligation)의 양상(modalité)에 의해 구별된다.

 

윤리적 입법은 […] 외재적일 수 없는 것이다 ; 사법적 입법은 외재적일 수 있다 […]. 윤리학은 분명 그것의 특수한 책무들을 역시 가지고 있지만(예를 들어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들), 법과 공통으로 가지는 책무들 역시 가지고 있다. 윤리학이 법과 공통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단지 책무의 양상 뿐이다.
(MdS, Einleitung, p. 220)

 

칸트의 규범성 이론에서 법과 윤리 영역의 이러한 위상학적 변화는 적법성과 도덕성의 구별의 의미 변화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몇몇 연구자들의 주장대로, “법에 부합함(conformité à la loi)” 혹은 합법성(Gesetzmässigkeit)이 적법성(légalité, legalität)과 동의어로 고려한다면, 『도덕형이상학』의 서문에서 적법성과 도덕성의 구별은 여전히 법과 윤리의 영역의 분할과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덕 형이상학의 분할(Divition d’une métaphysique des mœurs)”를 본다면 우리는 적법성/도덕성의 구별과 법/윤리의 구별이 더 이상 대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윤리적 입법(législation éthique)는 “어떤 행동을 책무(obligation)로 만들고 동시에 이 책무를 심급으로 세운다”. 반면에 사법적 입법(législation juridique)는 “법 안에 심급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 책무 그 자체의 관념과는 다른 심급을 인정한다”. 이로부터 “사법적 입법에 따라 실천되는 책무는 외적 책무일 수밖에 없”으며, (처벌에 대한 공포 같은)“외적 심급(ressort extérieur)” 요구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한편 윤리적 입법은 이와 반대로 외적 행동은 물론이고 내적 행동들에도 관련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윤리적 입법을 윤리적인 것으로 특징지어주는 것은 그것이 규정하는 대상이 아니라 규범에 의해 지시된 (내적•외적) 행동에 대하여 주체가 맺는 관계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적 입법은 “외재적일 수 없다”.

 

그런데 적법성과 도덕성의 구별은 이러한 윤리와 사법의 입법의 구별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두 입법의 구별이 책무가 부과되는 방식과 관련한다면 적법성과 도덕성의 구별은 행동 자체와 관련한다. 적법성은 “행동과 법(loi) 사이의 단순한 합치 혹은 불합치(concordance ou non-concordance)”를 가리킨다. 반면 도덕성은 “법(loi)에서 유래한 책무의 관념이 동시에 행위의 심급”인 상황을 가리킨다. 이러한 구별법에 따르면 주체는 윤리적 규범들과 관련하여 (순응주의나 위선의 사례처럼) 단순히 “법적(légal)” 관계를 맺을 수도 있으며 반대로 사법적으로 입법된 법적 규범들과 “윤리적”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정리하자면 사법과 윤리의 구별은 규범의 본성―규범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이 부과하는 책무의 양상―과 관련하고 적법성과 도덕성의 구별은 행동들의 성격과 관련한다. 전자의 구별은 입법된 법칙 자체가 지니는 심급이 외재적인지 내재적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후자의 구별은 주체의 행동이 규범과 맺는 관계와 관련한다. 이러한 법적 규범과 윤리적 규범의 구별은 더 이상 (법적 규범은 윤리적 규범보다 구속력이 더 약한 규범이라는 식의) 위계적인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책무의 양상” 사이, 요컨대, 규범성에 대한 주체의 관계를 사유하는 두 가지 방식 사이의 수평적 배치 방식이 되었다. 법은 행위들(actions)을 명령하는 것이고, 윤리는 구속력을 갖는 목적들(fins obligatoires)를 명령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후기 칸트의 글에서 사법적 규범성에 대한 재평가를 위한 분명한 노력을 읽어낼 수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칸트의 실천 철학이 역사의 발전과 함께 법은 점차 윤리의 영역으로부터 독립되어 그 자율성을 획득하기 시작한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도덕, 법, 윤리(Morale, droit, éthique)

그렇다면 칸트 철학 내에서 도덕, 법, 윤리의 범주는 어떠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가? 먼저 순수 도덕을 다루는 도덕 형이상학은 자연의 형이상학(métaphysique de la nature)와 구별된다. 왜냐하면 자연 철학의 자연의 법칙을 다루는 반면 도덕 철학은 경험과 무관한 자유의 법칙을 다루는 학문으로서 의지의 자율성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도덕 형이상학은 도덕적 인간학과도 구별된다. 왜냐하면 인간학은 기본적으로 자연학문의 영역에 속하며 인간학의 명제들은 교훈적이기는 하나 의무론적 성격을 지닐 수도 없고 규범적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학은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규범을 세우거나 그것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데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다. 이 점에서 칸트의 실천 철학은 “인간의 사회적이고 이성적인 본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 위에 책무에 관한 학설을 정립하고자 시도하는 그로티우스 등의 자연법 전통과 전혀 무관하다. 더 나아가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의 도덕 철학은 경험적 요소를 다루는 그의 이론 철학과도 다소 다른데 왜냐하면 칸트에게서 경험과 연관되어 있는 도덕의 영역(인간학)은 기술적-실천적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도덕적, 다시 말해, 도덕적으로 실천적인(moralo-pratique)인 것만을 다루는 도덕 형이상학의 영역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칸트에게서 (초월론적인) 실천 철학은 이성의 규범적 힘을 다루는 영역으로 제한된다.

칸트에게서 이러한 실천 철학은 법에 관한 학설(Rechtslehre)과 덕에 관한 학설(Tugendlehre)을 다루는 두 영역으로 분할된다. 도덕 형이상학의 이러한 분할은 앞서 우리가 검토한 적법성과 도덕성의 구별을 통해 이뤄진다. 그런데 이때 단순히 적법성과 도덕성의 구별이 법과 덕의 구별에 대응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적법성과 도덕성의 구별은 도덕성의 하위 범주로서 적법성의 범위를 정확히 규정함으로써 이에 관해 다루는 법에 관한 학설의 영역을 확정하는 데 사용된다. 물론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이러한 적법성과 도덕성의 구별을 통해 적법성을 다루는 법에 관한 학설을 아예 도덕의 영역에서 배제하였다. 그러나 앞서 확인한 대로 『도덕 형이상학』에서 이 구별의 의미는 변화하게 되며 후기 칸트는 적법성을 다루는 분과를 도덕철학의 한 부분으로 통합시키게 된다. 한편 도덕철학의 영역 내에서 법과 윤리는 규범들의 객관적 내용이 아니라 오직 “책무의 양상”에 따라서만 분할된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모든 사법적 책무는, 그것이 책무라는 점에서, 윤리적 책무이기도 하다. 한편 윤리적 책무는 법과 공통의 책무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자신만의 특수한 책무들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객관적으로 본다면 법의 범주가 윤리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자가 그 독자적 실재성을 잃고 후자로 환원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두 범주를 구별시켜주는 것은 개개의 규범들의 내용이 아니라 책무의 심급이 (내재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거나 포함해야 하기에) 외재적인 것일 수 없는지 혹은 외재적인 것일 수 있는지 여부이기 때문이다.

『도덕 형이상학』에서 수행된 이러한 범주의 구분은 칸트 철학의 용어법의 변경으로 이어진다. 『실천이성비판』에서 도덕은 윤리와 사실상의 동의어였다. 하지만 1796-1977년 이후로 도덕의 일부로서 법의 범주가 독자적 실재성을 갖게 되면서 도덕과 윤리 사이에 새로운 구별이 들어선다. 도덕은 유 개념이 되고 법과 윤리는 그 유에 속하는 종 개념이 된다. 이러한 칸트의 새로운 용어법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칸트가 영구평화에 관한 글에서 정치가들이 “도덕 앞에서 무릎을 굽혀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에서 “도덕”의 의미를 정치가들의 적법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읽지 않고 윤리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으로 읽음으로써 칸트의 정치철학을 오독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

저자는, 논문 안에서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이 이 논문에서 밝힌 문제에 모두 긍정적 답변을 내놓고 있다. 먼저 우리는 칸트에게서 균일하고 일관적 규범적 이성에 관한 이론을 수립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천적 규범성 일반의 이론을 구성하는 『도덕형이상학』이 여전히 『실천이성비판』의 두 가지 가르침, 1) 이성의 규범적/실천적 힘이 존재한다는 것과 2) 이 힘은 모든 규범적 명제들의 규범성을 평가하는 시험에 부치는 절차 속에서 발휘된다는 것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근본적 가르침의 유지되는 동시에, 『도덕형이상학』에서는 법의 영역과 윤리의 영역 사이의 위계질서가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는 칸트의 실천 철학 내에서 법의 영역이 자율성을 확보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