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기록

케르베강이 설명하는 법철학

RenaCartesius 2023. 11. 20. 04:21

장-프랑수와 케르베강의 브랭 서점 강연을 요약한 것

 


 

법철학의 등장

법철학(la philosophie du droit)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생긴 학문 분과이다. 우리는 이 학문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기를 이 분과에서 최초의 가장 중요한 저작 가운데 하나인 헤겔의 『법철학(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의 출간된 1820년으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법철학’이라는 표현은 헤겔의 이 저작 이후 더욱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물론 ‘법철학’이라는 표현이 생겨나기 이전에 법에 관한 철학적 사유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법에 대한 사유는 ‘자연법(le droit naturel)’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었다. 실제로 많은 대학들에는 ‘자연법’ 전공 교수직이 있었다. 그러나 점차 ‘법철학’이라는 표현이 단지 이름 뿐만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자연법’을 대체하기 시작한다. 헤겔이 『법철학』에 “자연법과 국가에 관한 학문 요강(Naturrecht und Staatswissenschaft im Grundrisse)”라는 부제를 붙인 것은 그가 자신의 사유를 ‘자연법’의 전통에 위치시키는 동시에 이에 관한 사유에 ‘법철학’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통해 혁신을 일으키고자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헤겔 이전의, 18세기에는 ‘자연법’의 훨씬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나 1820-30년 사이에 점차 사라지면서 ‘법철학’이라는 용어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법철학은 도덕철학 및 정치철학과 어떤 점에서 구별되는가?

법철학은 우선 제도적 차원에 도덕철학 및 정치철학과 구별된다. 법철학을 전공하고 법과 관련한 문제들을 다루는 전문가는 도덕철학 및 정치철학 전문가와 구별된다. 전자가 주로 법학과에 소속되어 있다면 후자는 주로 철학과에 소속되어 있다. 그런데 이처럼 행동의 규범을 다루는 분과들이 제각기 다른 제도적 기관에서 상이한 전문가들에 의해 연구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케르베강에 따르면 이것은 지난 3세기 동안 일어난 ‘규범적 체계들의 분화(différenciation des systèmes normatifs)’ 현상의 결과이다. 사실 중세 말부터 근대 초까지는 규범적 소명(vocation normatif)을 지닌 학문들, 다시 말해서, 도덕철학과 정치철학 그리고 법철학은 통일되어 있었는데 왜냐하면 이 학문들이 종교라는 공통의 토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종교 개혁 등 여러 원인으로 인해 더 이상 종교적 진리에 대한 공통된 의견을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정치철학, 도덕철학, 법철학 등 규범적 분과학문들 흔히 말하는 ‘세속화(sécularisaion)’ 과정을 거치면서 신학적•종교적 토대로부터 분리되어 각자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공통의 지반이 없기 때문에 각각의 분과 학문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영역을 다루게 되었다. 예컨대 정치철학은 오래 전부터 공동선(bien commun)과 관련된 문제―정치체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 민주정이 군주정보다 선호될 만한가? 등등―를 다루었으나 이제는 정치철학은 도덕적 문제와 관계 없이 오직 집단적 행동의 규범에 관해서만 다루게 된다. 마찬가지로 도덕철학 역시 정치철학과 분리되어 개인적, 말하자면, 주관적인 행동 규범을 다루게 된다. 법철학의 경우는 집단적 행동 규범을 다루는 공법과 개인적 행동 규범을 다루는 사법으로 나뉘지만 법철학이 다루는 규범은 정치철학이나 도덕철학과 다른 범주의 규범에 속한다.

법실증주의(positivisme juridique)란 무엇인가?

법실증주의는 ‘법은 법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le droit se suffit à lui-même)’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이 말은 법에는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어떠한 외부적 토대―예를 들면 철학이나 도덕, 종교 등―에 기초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법실증주의는 19세기부터 헤게모니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단, 주의해야 할 점은 법실증주의가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 아니면 비엔나 학파의 실증주의 같은 철학적 실증주의와는 별로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한스 켈젠처럼 개인적으로 비엔나 학파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예외도 없지는 않다) 이처럼 법이 철학과 종교로부터 독립성을 주장하는 사상이 힘을 획득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법전의 집대성(codification du droit ) 움직임이 그 배경으로 있다. 법적 문제와 관련하여 참조할 문헌이 확고해지자 더 이상 다른 토대를 찾는 것이 무용해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Jean-Joseph Bugnet의 “나는 법이 무엇인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나폴레옹 법전의 조항들 뿐이다(Je ne sais pas ce que c’est que le droit, je ne connais que les articles du code Napoléon).”라는 말은 법실증주의가 무엇인지 잘 알려준다.

이러한 법실증주의는 시대를 거치며 다양화되었다. 우리는 법과 도덕의 관계와 대해 취하는 입장에 따라 경성 실증주의(hard positivisme)와 연성 실증주의(soft positivisme)를 구별해볼 수 있다. 경성 실증주의는 법적 규범과 도덕적 규범 사이에 엄격한 경계가 있다고 보는 입장으로 그 대표적 사상가로는 한스 켈젠을 들 수 있다. 연성 실증주의는 법과 도덕 사이의 관계를 그보다는 더 유연하게 사고하는 입장으로 그 대표적 사상가로는 Herbert Lionel Adolphus Hart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법실증주의의 다양화는 법에 관련한 성찰에서 이미 법실증주의가 확고하게 지니고 있는 헤게모니를 보여주는 동시에 실증주의가 제대로 답변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컨대 법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 어떻게 법을 다른 규범적 학문과의 독립시켜 사유할 것인지 혹은 다른 규범적 범주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관한 문제들 말이다.

법실증주의의 대안 이론

법실증주의의 대안 이론에는 두 가지가 있다 : 1) 자연법 이론 ; 2) 제도주의 학설

자연법 이론은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의 자연법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 이론은 실정법 위의 어떠한 메타적 토대가 있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한다. 가톨릭 철학자 자크 마리탱 혹은 레오 스트라우스가 현대의 자연법 이론의 대표자이다. 스트라우스의 경우, 고대 철학에 근거하여, (역사주의에 매몰되어 자연법 이론을 비판한) 근대철학(홉스, 헤겔, 마르크스 등)의 파산을 극복하고자 시도한다.

제도주의 학설은 자연법 이론과 실증주의 사이의 중간 지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 학설에 따르면 제도는 자연은 아니지만 일종의 제2의 자연(seconde nature)내지는 자연이 된 문화(culture devenu nature)로서 법이 근거할 수 있는 토대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제공할 수 있으며 또한 법은 (법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법을 조직하고 실행하는 제도적 기관에 기초해야 한다. 이러한 제도에는 대표적으로 국가가 있으며, 사법의 영역에서는, 인격, 재산, 계약 등의 개념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 제도주의의 대표자는 칼 슈미트, 산티 로마노, 루돌프 스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