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잡기

20231217_計

RenaCartesius 2023. 12. 18. 06:13

엄지 수난시대라고 해야 할까. 지난 주에는 양파스프에 넣을 바게트를 썰다 빵칼에 왼쪽 엄지를 베이고 이번 주에는 오래 되어 군데군데 크랙이 있는 핸드폰 액정을 터치하다가 오른쪽 엄지가 살짝 베였다. 엄지는 아니지만 오늘은 또 침대 시트를 교체하다가 왼손 중지의 손톱이 들려 피를 보았다. 
 
이번 주는 허투로 살지는 않았지만 공부는 많이 하지 못 했다. 연어 스테이크를 굽고 라클레트 파티를 기획하고 개신교 교회에서 열린 합창단 공연을 보러 갔으며 세미나 촬영을 하고 양파스프를 한 번 더 해보기도 했다. 요리도 공부도 다 마찬가지라 하면 할 수록 더 실력이 느는 부분이 있다. 처음 할 때보다 시간도 더 단축되고 훨씬 간단한 동선으로 요리를 해냈다. 그런 반면에 공부는 제대로 하지 못 했는데 우선 마감 기한 내에 교정을 봐야할 원고가 있어서 그 일을 하느라 붙들려 있던 점이 크다. 하지만 분명히 내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충분히 그 시간을 살리지 못한 것은 괜한 일들의 연속으로 생긴 마음의 동요 탓일 거다. 
 
지도교수는 참 특이한 사람인 것 같다. 지도교수가 편집하는 한 잡지를 우연히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몇 권의 책들에 대한 지도교수의 리뷰가 실려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마티니치의 책이었다. 예전 면담 때 내가 마티니치의 책을 읽었다고 했는데 당시 지도교수는 자신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며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했다. 그런데 정말 읽고 그걸 또 리뷰까지 썼단 말인가. 물론, 내가 읽은 책은 홉스의 전기였고 지도교수가 리뷰를 쓴 책은 조금 더 주저에 가까운 도서인데다 무엇보다 나 때문에 마티니치를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해당 잡지에는 다른 지도 제자들이 쓴 도서 리뷰들도 실려 있었다. 나도 언젠간 그런 제자 중 한 명이 될 수 있을런지? 
 
가끔 가던 카페가 원두를 바꾼 것 같다. 가격 대비 맛이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이 정도면 충분히 4유로를 지불하고 마실 만하다. 
 
어쩌면 나에게 예술이란 별 거 아닌 것일지 모른다. 더 정확히 말해서 내가 예술을 소모하는 방식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못 된다. 예술은 시간을 잊게 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나에게 안락함 이상의 문화의 기준은 없을지 모른다. 나는 교양이나 미적 체험을 형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빨리 흐르게 하기 위해 자아를 잃게 하기 위해 나는 예술를 보러 다닌다. 그 점에서 나에게 예술은 그 본질 상 어쩌면 술이나 담배 혹은 운동이나 오락 따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어떤 것들은 나 자신을 한 번 잃고 난 뒤에 더 단단해진 나 자신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이때의 '어떤 것'은 전적으로 개별적이다. 
 
겨울은 슬픔을 느끼기에 좋은 계절이다, 라고 이번 주 월요일의 나는 써두었다. 이 문장을 쓴 직후 계속 일이 풀리지 않았다는 것은 기억이 난다. 수업은 난데 없이 취소되고 애써 빌린 전기 자전거는 배터리가 없었고 도서관에 도착해서도 반납 공간이 없어서 한참 기다려야 했으며 커피라도 마시려는 데 휴게실의 모든 자판기들은 고장 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왜 저 문장을 썼는가 그때 나의 마음은 어떠했는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마음과 관계 없이 나는 저 문장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겨울은 쌀쌀하고 또한 쓸쓸해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어느 때보다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데 대개 한 사람의 마음이란 그 한 사람의 마음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 더 많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슬픔을 더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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