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알베르 카뮈, 『최초의 인간』

RenaCartesius 2022. 7. 4. 08:12

학업과 관련해서 받은 조언 가운데 한 가지는 어떤 사상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사람에 대한 해설서를 찾아보기보다는 그가 참조하고 있는 문헌들을 읽음으로써 어떠한 배경에서 말하고 있는지 파악해보라는 것이다. 번역을 맡은 책의 초벌 번역이 거의 끝났다. 다음주 월요일이면 마칠 수 있을 것이다. 번역어 통일은 커녕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비문 투성이이기 때문에 손볼 곳이 많을 원고이겠지만 우선 책 전체의 한국어 원고가 완성된 셈이다.  남은 시간은 윤문과 역주 달기 그리고 역자 해제 작성에 사용하려고 한다. 그리고 저자가 참조하고 있는 책을 천천히 읽어보려고 한다. 

 


 

오랫동안 문학작품을 등한시하기도 해서 최근에는 소설을 읽고 싶었다. 일본문학이 끌려서 예전에 이북으로 구입해둔 나츠세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펼쳤지만 무척 따분하게 느껴져서 그만두었다. 지금 맡은 책의 번역 질을 높이기 위해서, 라는 핑계로 저자가 참조하는 작품은 가능한 한 많이 읽어두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그 책의 참고문헌 가운데 하나를 골라 읽기로 했다. 참고 비중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스탕달의 『적과 흑』부터 읽어야겠지만 손이 잘 가지 않았다. 물론 카뮈의 『최초의 인간』도 마찬가지였는데 나는 그의 글을 늘 읽기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어제 오늘 이 책 저 책 번갈아 가며 조금씩 읽다가 결국 카뮈를 먼저 읽기로 결정했다. 

 


 

카뮈는 늘 잘 읽히지 않는다. 그가 펼쳐 보이는 사태가 무척이나 낯설고 어렵기 때문이다. 카뮈의 『안과 겉』을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마도 나는 이 소설집을 여름 휴가를 떠나는 부모님의 차 안에서 읽었을 것이다. 차창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이 펼친 책을 비추던 것이 기억난다. 카뮈의 문장은 어려웠다. 카뮈의 문장은 단순히 사태를 지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태는 응당 그러한 것으로 있어야만 한다고 지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카뮈가 보여주는 그 당연함 속으로 파고들 수가 없었다. 노파는 왜 고집스러운 존재이어야만 하는지. 왜 우리는 그렇게 고독해야만 하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카뮈의 문장은 자신의 뒤편에 놓인 세계를 지시하기는 하되 그 문장들 자체는 마치 빽빽하게 도열한 병사들과 같아 세계 속으로 틈입하는 것을 가로막는 느낌이었다. 잘 읽히지 않는 그 문장을 그럼에도 놓지 않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따라간 까닭은 응당 지적 허영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 읽어야만 하고 이해해야만 하며 이해할 줄 알아야만 하는 작가였다. 그를 읽고 아무 감상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내게 읽을 것을 지시하는 카뮈의 이방인 같은 지시문을 차례로 붙잡으면서 그 문장이 지시해 보이는 세계의 겉면을 훑어 나갔다. 그곳에는 결코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낯선 도시에 방문한 방랑하는 한 영혼이 있었다. 어느 여름 초저녁 눅진한 더위가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할 때 음식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여 풍겨오는 그리 청결하지 않은 한 식당에서 싸구려 음식을 삼키는 한 영혼이. 마을 사람들의 시끄러운 수다 소리 그리고 라디오를 통해 흘러 나오는 음악과 함께 그는 자연스럽게 그 고장의 공기 속으로 감싸였지만 그럼에도 그 마을에 받아들여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럴  수 없었다. 카뮈의 세계를 나는 결코 내 안으로부터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 세계를 지시하는 문장들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들이 소화될리가 없었기에 그해 여름의 그 순간은 카뮈의 여름과 함께 내 속에 영원히 남아있다. 여전히 나는 무슨 일으로든 낯선 도시를 방문할 때 카뮈의 이 장면을 떠올린다. 계절이 여름이 아니고 음식이 싸구려가 아닐 지라도.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어젖히거나 문턱을 넘는 그런 행위가 없었음에도 나는 어느샌가 결코 들어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세계의 안쪽에 서있게 되었다. 동시에 카뮈는 그렇게 나의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카뮈가 어째서 프랑스 문단에 냉소를 보내고 거리를 두며 응당 두어야 하는듯이 말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일종의 고집이자 성격적 특색 자신의 입지를 돋보이게 하려는 전략적 태도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뮈의 그런 태도는 어느샌가 내 안에 자리잡아 '진정한' 문인이라면 그런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문학을 한다면서 무리를 짓고 다니는 모습이 영 이상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지금 번역하고 있는 책을 번역하는 동시에 읽어나가면서 이제는 카뮈가 어째서 그런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도록 조건지어졌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다소 촌스럽게 느껴졌던 어머니를 향한 그의 애정도 내가 한때 그 아름다움과 무상성을 의심했던 카뮈의 여름과 하늘도.

 


 

이제 내 내면을 주제로 하는 글은 공개적인 장소에 그다지 올리고 싶지 않아 일기장에만 기록해두었는데 오랜만에 카뮈의 작품을 읽고 예전에 썼던 기록이 떠올라 조금 수정하여 옮겨본다. 『최초의 인간』을 다 읽으면 조금 더 추가해보겠다. 또 이것은 단지 나의 감상이 아니라 카뮈의 작품 자체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효과에 관한 것이므로 카뮈에 대한 기록이라고 치자. 그리고 사실 논문 읽기가 싫었기에. . . . 

 


우선 작품에 대한 감상 외적으로는 얻은 것이 분명한 독서였다. 해제를 마무리할 문장을 구상했고 인용하면 좋을 문장들을 얻었으니까 말이다. 

 


 

부록으로 실린 잠언과도 같는 작가노트가 더 와닿았다.

미완성으로 남아버린 『최초의 인간』의 교정되지 못한 부분들이 초기작품인  『안과 겉』의 서투른 면을 떠올리게 했다. 

그 점이 나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계속 ― 그는 어린 시절은 다시 찾지만 아버지는 되찾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최초의 인간임을 깨닫게 된다.

 


 

이번에도 역시 영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영영 남아버리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뮈는 이제 내게서 거의 기피대상이 되어버려 어지간해서는 읽지 않는 작가인데 그럼에도 읽게 되었던 약간의 작품들 모두 그러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같은 효과가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은 꽤나 개연적일 것이다.

 


 

역사 없는 자들의 역사를 쓰겠다는 작업은 내게는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의 역사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당연한 일인데 왜냐하면 그들의 역사는 어떠한 책으로도 전해진 바가 없고 나는 그들의 역사 속에 놓여 있지도 않으며 그들의 역사적 후손과 교제하지도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켜켜이 쌓여 당연함으로 응축된 역사를 알지 못하니 카뮈의 인물들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나는 예측할 수가 없다. 다만 최초의 인간이 전해준 그의 유년 시절로부터, 역설적이게도, 역사성보다는 항구성을 지닌 그러한 역사를 짐작해보려 힘쓸 뿐이다. 카뮈는 나에게 언제나 시간의 추이에 따른 서사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이라기보다 풍경을 보여주는 영사기와도 같은 존재였다. 덩굴과도 같은 카뮈의 문장을 따라가면서 서사를 파악하는 무척이나 버거운 일이지만 그의 문장이 지시하는 장면은 마치 영혼에 날인이 된 것처럼 내게 남기도 한다. 마치 스냅숏처럼. 해독하지 못하는 외국어로 된 영화를 자막도 없이 관람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영화의 줄거리를 나는 말하지 못하지만 어떤 장면들은 여전히 떠올릴 수 있다. 어떤 장면은 그 맥락이 되는 역사를 공유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순간은 역사의 퇴적층을 초월하여 모두에게 공통적이기 때문이다.